▲ 최성각

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가평에 큰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일러 ‘경강교’라고 부른다. 그 다리명은 강원도와 경기도 사이에 흐르는 북한강 도계(道界)에 걸쳐진 다리라 모든 게 ‘서울’ 중심으로 굴러가는 이 나라에서 고뇌도 정취도 없이 쉽게 붙여진 이름으로서 참으로 재미딱지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아전인수의 세계관에 의탁해 말하자면, 그 다리명은 ‘강경교’가 옳을 것이다. 뜬금없이 왜 다리 이야기를? 지금은 기명 컬럼만 가끔 쓰는 지인이 오래 전에 말하기를 “그래도 경강교 딱 건너면 강원도민일보, 막강하지요”라고 말했던 게 생각나서다. 그게 누구의 의식이라는 말인지 아리송하지만, 나는 언론학자도 아닌 일개 시민이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아하, 이 양반은 언론을 권력으로 간주하고 계시는군!”,하는 마음으로 권력자인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나의 언론관은 언론이 권력이라기보다는 ‘권력을 감시하는 기관’이다. 1부와 2부가 위민과 도덕을 앞세우지만 늘 온갖 실책과 패악을 일삼을 때 그것을 ‘건설적인 치우침’이라는 정견에 의거해 비판하고 엄혹하게 감시해야 하는 책무를 자임한 것이 제3부(언론)로 나는 알고 있다.

비록 오늘은 생일을 자축하는 시간이지만 23년 동안 강원도민일보는 또 하나의 권력기관이었을까, 권력감시자였을까? 이 대목에서 문득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이 생각난다.

“소나무가 어제까지 공중에서 차지했던 자리는 앞으로 200년간 텅 비어 있을 것이다. 소나무는 이제 단순한 목재가 되었다. 나무꾼은 하늘의 공기를 황폐케 한 것이다. 봄이 와서 물수리가 머스키타퀴드 강변을 다시 찾아올 때 그는 소나무 위에 자신이 늘 앉던 자리를 찾으려고 허공을 헛되이 맴돌 것이다. / 그리고 솔개는 새끼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만큼 높이 솟았던 소나무가 사라진 것을 슬퍼하리라. / 왜 마을의 조종(弔鐘)은 울리지 않는가?”

소로가 남긴 <한 소나무의 죽음>이라는 글이다. 이것은 19세기 콩코드 지방에 살았던 한 이상주의자의 탄식과 소망이었을 뿐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베어진 소나무가 남긴 텅 빈 허공 때문에 조종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소로는 그 황당하고 특별한 감성 때문에 당대에 ‘또라이’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200년간의 허공을 안타까워한 그 특별한 감성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세계에 감동과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소로가 말한 ‘마을의 종소리’를 나는 언론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도민일보는 단 사흘의 국제경기 때문에 굳이 허물지 않아도 될 가리왕산의 500년 수림이 파괴될 때, 삼척에 핵발전소 소동이 일어났을 때, 충분히 요란한 종소리를 냈던가, 생각하게 된다.

미증유의 스마트폰 시대에 사람들은 더 이상 종이신문을 읽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도세에, 설상가상의 종이신문 괄시 속에서 지난 23년 동안 신문을 우직하게 지켜온 기자들과 직원들에게 한 독자로서 경의를 표한다. 종이신문이 살아남기 위한 여러 고민과 모색이 있겠지만, 소나무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며 왜 조종이 울리지 않는가라고 묻는, 우리가 잃어버린 감수성과 세계관으로 무장할 때 ‘강원도민일보’는 되레 명품신문이 될 것이다. 접적지역이라는 핑계로 안보상업주의에 함몰되고, 언제나 당대의 현실권력을 충성스럽게 지지했지만 ‘소득별무’인 밑지는 정서를 고수해온 불가해한 지역정서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에 대한 감성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난국(難局)의 출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강원도민일보가 이 나라 어떤 지역신문에도 없는 분명한 색깔을 가지고 큰 시야로 시대의 핵심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경제문제나 역사왜곡 문제나 서양문명의 끝자락을 암시하는 십자군전쟁도 중요하지만, 길게 바로 본다면 시대의 핵심은 생명문제다. 창간23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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