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전 아픔서 피워낸 월드컵·아시안게임 성공 개최
>> 연평해전
월드컵 3·4위전 당일 북 경비정 기습포격
우리 해군 6명 희생
사회 이념갈등 초래
대한민국이 한일월드컵의 뜨거운 열기속에 빠져있던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는 남과 북의 해군이 교전을 벌였다.
터키와의 3·4위전이 열리던날 이날 오전 북한경비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남측 북방한계선을 계속 침범했다.
우리 해군이 경고방송을 한 이후에도 물러서지 않자 교전 대비태세에 들어가던 차 북한 경비정이 기습포격, 참수리 고속정이 침몰했다. 25분여간의 교전에서 고속정에 타고 있던 윤영하 당시 대위를 비롯한 6명의 젊은 목숨이 희생됐다. 19명의 부상자도 발생했다.
북한측 피해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공식적으로 북한측 해군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은 우리 해군의 공격을 받고 모든 포탑이 파괴 됐으며 조타가 불가능한 상태로 계속 빙글빙글 돌다 북한 경비정의 예인을 받고 25분만에 퇴각했다. 북한군 사망자는 3∼4명에서 수십명까지 주장하는 측마다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해전 이후 남북은 물론 한국사회에 치열한 이념갈등이 초래됐다. 정부와 우리 군의 대응이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는 것이 주요 비판이었다.
더욱이 이 해전은 북한의 계획적인 도발로 밝혀졌다. 1998년 제1연평해전의 일방적 패배에 따른 보복차원의 도발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교전 직후 당초 일정대로 한일 정상회담과 함께 폐막식에 참가한 일로 유족과 보수진영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김대중정부는 “승리한 전투이고 추가 도발 징후가 없으며 폐막식 참가를 안하는 경우 월드컵으로 고조된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당초 예정된 일본방문과 폐막식 참석일정을 강행했다.
그러나 “나라 지키다 젊은이가 죽었는데 국군 통수권자가 축구 본다고 가서 웃고, 너무하지 않느냐”라는 비판도 이어졌다.
결국 김 대통령은 7월 2일 방일 일정을 마친 후 직접 국군병원으로 가서 위문, 쾌유를 기원했다. 그러나 해군장으로 열린 합동영결식에는 대통령을 포함해 국방부장관은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이한동 국무총리는 분향소에 방문했지만 김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관련행사에 대통령이 참여하게 된 건 10주기 기념식에 이명박 대통령이 최초였다. 이 해전은 서해교전으로 불리다가 2008년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