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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웅의 풍수유람] 11. 장준하와 권재혁 묘소

조국해방 민족통일 외친 장준하 선생 이장묘 대명당

손건웅 2016년 12월 30일 금요일
   
▲ 2012년 8월,파주 성동리로 이장한 장준하 묘소.

>>> 장준하
긴급조치 1호 구속 출소 후 의문사
초장지 유골 보존 잘돼 사인 규명



■장준하와 그의 묘소

2011년 8월의 호우로 장선생의 묘소 뒤 축대가 무너졌다.유족은 묘지의 이장을 결정한다.이장작업 시 유골이 언론에 공개되자,의사 출신 한나라당 정의화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선생의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타살이라고!”라는 글을 올렸다.유물이 역사를 증언하듯,유골은 37년 전의 억울한 죽음을 항변한 셈이다.

이전에 필자는 선생의 묘소는 자리가 괜찮은 곳이라 했다.유골이 잘 보존되어 사인(死因)을 밝혔으니 명당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장준하(1918년 8월 ~ 1975년 8월),그는 누구인가.일제의 침략만행이 극에 달하던 1944년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서주(徐州)의 일본군(日本軍) 쯔카다(塚田)부대에 배속된다.같이 배속된 3명의 동료와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칠흙같은 야음을 틈타 3m가 넘는 철조망을 넘어 낮에는 수수밭에 몸을 숨기고,밤이 되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사흘 만에 중국인 지방군을 만난다.이 때 통역자로 나타난 젊은이가 학도 탈주병 1호였던 김준엽(전 고대총장)이었다. 장선생 일행 50여명은 광복군이 되기 위한 일념으로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重慶)을 향해 6000리 장정에 오른다.광복군에 편입되어 동료 18명과 서안(西安)으로 파견되어 미군의 OSS훈련을 받고,국내 진입을 위해 대기중에 해방을 맞이하여,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들과 귀국했다.

   
▲ 장준하의 초장지.파주 신산리 소재.2010년 11월 촬영.

6·25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도,부정부패한 자유당 정권은 국민들 가슴을 멍들게 하였다.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월간 사상(思想)을 발간을 시작으로,1953년 4월 월간지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한다.1956년에는 3만부를 넘어서는 비약적 발전을 거듭한다.1958년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을 거재하고,1960년에는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기사를 실어 4·19혁명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광복군 출신의 장선생은 일본군 출신인 박정희에게는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다.1964년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을 위한 전국순회강연을 시작으로 1966년 재벌의 밀수진상에 대한 연설로 구속을 당한다.1967년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옥중(獄中) 당선되는 기록도 세웠다.1974년,민주회복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이듬해에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된다.병 보석으로 출소후인 1975년 8월 17일,포천 이동면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37번의 연행과 3번의 구속, 양복 한 벌과 단칸방이 광복군 장준하가 남긴 것의 전부였다.

장준하 선생은 2012년 8월 파주 성동리로 이장되었다.경기영어마을 뒷산에서 출발한 맥로는 변전굴곡을 거듭하며 진행하다 좌선(左旋)하여 낙맥하여 이곳에 대명당을 결혈하였다.목금체(木金體) 오두산을 안산으로 하고 그 뒤로는 북쪽의 임진강과 남쪽의 한강,두 대강수가 합류하는 곳이니,조국해방과 민족통일에 평생을 보낸 장선생에게 어울리는 자리라고 생각이다.
 

   
▲ 권재혁 묘소.모란공원 묘원 소재.

>>> 권재혁
1969년 반국가단체 혐의 사형 판결
2014년 5월 대법원 재심 무죄 선고




■젊은 경제학자 권재혁의 사연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오리건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수료하고,귀국하여 육사에서 교수로 재직한다.1968년,중앙정보부는 권재혁 등이 남조선해방전략당이란 반국가단체를 조직했다고 발표했다.대법원은 이듬 해 9월,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두 달만에 형(刑)을 집행한다. 권재혁은 그렇게 45세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그리고 45년이 지난, 2014년 5월에 대법원은 그에 대한 재심판결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권씨는 불법 구금돼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했으며,국가 전복을 목적으로 반국가단체를 구성했거나 간첩행위를 했다는 점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판결이었다.

‘저는 사형수의 딸입니다’ 우연히 보게된 배우 권재희의 인터뷰 제목이다.40년을 넘게 굳게 다물었던 그가 공개적으로‘아버지’의 이름을 꺼낸 것이다.한 없이 자상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뜬 것은 그가 7살 때였다.오빠는 연좌제에 저촉되어 해외유학의 꿈이 좌절되었다.주홍글씨가 새겨진 그들은 공무원,교사등 평범한 직업도 택하기 어려웠다.권씨가 미스롯데에 참가해 배우의 길을 걷게된 계기이기도 했다.낮에는 대학을 다녔고,밤에는 돈을 벌기위해 연극무대로 나섰다.학생운동으로 사회가 들썩이던 격변의 시절,친구들은 배우가 된 그녀를 ‘팔자 좋은 집에서 태어난 금수저’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맥로는 전면에서 진입하여 권재혁 묘소에 정확히 결혈하였다.사진의 좌우홍선 안쪽은 자리가 될 수 있는 섹터이다.후손이 자립하기에 충분한 역량의 혈처에 자리한다.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은 대부분 자리가 될 수 없는 섹터이다.문익환,계훈제,이소선,전태일,조영래,최종길,김근태… 자리가 좋지 않을 것을 확인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권재혁의 묘소는 이곳과는 거리가 있는,관리사무소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광복군 출신의 장준하는 물론 권재혁의 부친도 기미독립 시위에 가담한 인물이었다.이 땅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의 삶은 여전히 버겁기만하다.그럼에도 장준하와 권재혁의 묘소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어,그 억울한 죽음을 신원할 수 있었고,후손들도 당당한 사회인으로 자립할 수 있었다는 풍객의 소견이다.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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