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간첩 편견 두려워… 아이들은 평등하게 대우받길”
가난·배고픔에 남한행 결심
3개국 거쳐 3개월만에 입국
식당서 하루 10시간씩 근무
주변 시선에 탈북 회의감도

▲ 춘천의 한 김밥집에서 일하고 있는 탈북자 강미진(사진 맨 오른쪽)씨가 가족들과 함께 중국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있다. 사효진

“산전수전 겪고 정착 9년째 차별없는 국가서 살고 싶어”


“태국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등 배타고 산넘어 목숨 걸고 대한민국으로 왔어요.탈북자라는 편견 대신 고향이 북한인 한국사람으로 생각해 줬으면 해요.”

지난 6일 오후 춘천시 운교동의 한 김밥 집.“손님,조금만 기다려주세요.꼬마김밥과 찹쌀로 만들어서 더 맛있는 함경남도 순대 곧 나갑니다.” 특유의 북한 말투가 녹아있는 강미진(44)씨의 시원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며 강 씨의 손길은 한참동안 분주했다.친인척의 가게에서 일을 하는 강 씨는 탈북자다.그의 고향은 납과 아연 생산지로 유명한 함경남도 검덕이다.손님이 빠진 후 잠시 여유를 찾은 그에게 올해 소망을 물었다.강 씨는 “춘천에서 벌써 9번 째 새해를 맞는다”고만 말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뗀 그는 “‘북에서 왔대’라는 불편한 시선과 탈북자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이어 “가족 건강,돈을 많이 벌어서 아들,딸이 원하는 것을 다해주고 싶다”며 “(아이들이)차별받지 않고 남한의 아이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9년 째 춘천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강 씨는 아직 남한 생활이 낯설다.병원 엠뷸런스 소리만 들려도 북한에서 자신을 잡으러 온 것 같아 더욱 움츠러든다.

 

그는 중국을 거쳐 베트남과 태국으로,다시 한국으로 들어오기까지 3개월의 시간이 걸렸다.태국에서는 한국으로 신병이 인도되기 전 까지 한달 간 감옥에 갇혀 열병에 걸리는 등 죽다 살아난 경험도 했다.그가 탈북을 결심한 계기는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 때문이었다.4남매의 막내인 그는 지난 1999년 고향 친구와 함께 중국 연변으로 넘어갔다.강 씨는 “뱃가죽이 등가죽에 가서 달라붙는다는 느낌을 아느냐”며 “우리 가족은 북에서 옥수수 뿌리와 소나무 껍질을 삶은 물을 먹으며 끼니를 때웠다”고 회상했다.그는 당시 어머니에게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서 한달 후에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고향 땅을 밟지 못한지 벌써 18년이 흘렀다.중국에서는 연변,장춘,청도 등을 오가며 10년 가까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지냈다.

고향에 돌아가면 목숨을 잃을 수 있어 돌아갈 수도 없었다.병명도 모른 채 1년 간 몸져 눕기도 한 강 씨는 중국 동포인 남편을 만나 아들을 낳고 삶에 대한 의지를 조금씩 찾으려 했지만 여전히 버거웠다.자유가 보장되고 배고픔이 없다는 남한의 삶을 동경한 그는 지난 2008년 4월 ,탈북자 13명과 함께 남한행을 도와주는 브로커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청도 앞 바다에서 15명이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배에 몸을 실었고 배는 감시망을 피해 어둠 속에서만 이동했다.중국을 떠난지 3개월만에 태국에 도착한 강 씨 일행은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에 찾아가 탈북자라고 자수한 후 한달 간 재판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강 씨는 그 해 8월 남한 땅을 밟았다.그는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주거지로 분단도인 강원도 춘천을 택했다.고향 땅과 인접한 곳에서 생활하며 부모님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다는 마음 때문이다.그래서 닭갈비식당 등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며 악착같이 버텨냈다.그러나 희망도 잠시,그는 춘천에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로부터 ‘부모님이 아사(餓死)했다’는 소식을 들어야했다.

탈북자에 대한 차가운 시선도 견디기 힘들어 탈북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다.그는 “‘탈북자=간첩’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편견이 두려워 일 외에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고백했다.이어 “무서운 일을 다 겪고 왔는데 편견과 마주할 때마다 살아갈 힘을 잃는다”며 “북한 억양을 교정하기 위해 퇴근 후 집에서 ‘어서오세요’,‘감사합니다’ 등 식당에서 응대하는 말을 아직도 연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스스로 탈북자들에 대한 편견에 맞서기로 하고 먼저 이웃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지난해 부터 매주 1회 노인복지회관에서 점심 급식 봉사를 하고 있다.그는 “굶주려 돌아가신 부모님께 생전에 못해드린 식사를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어르신들께 봉사하고 있고 못다한 효도를 어르신들께 하겠다”며 눈물을 훔쳤다.

인상 깊었던 일들도 있었다.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투표에 참여한 것이다.강 씨는 지난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18대 대선에서 첫 투표권을 행사했다.민주국가에서 늦둥이를 키워보고 싶어 마흔에 둘째를 가진 강 씨의 출산일은 공교롭게도 선거 날이었다.강 씨는 “출산이 임박했지만 우리나라의 지도자를 내 손으로 꼭 뽑고 싶었다”고 말했다.‘9년간 느낀 대한민국은 공정한 것 같냐’는 질문에 대해 강 씨는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는 “나라가 든든해야 백성의 마음도 든든한데 대통령이 일부의 말만 잘 들어서 되겠느냐”고 말했다.이어 “대한민국이 잘 돼야 우리 같이 힘 없는 탈북자들을 정부에서 보듬어 줄 것”이라며 “공정한 사회,편견과 차별이 없는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소망했다. 박지은 pje@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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