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부모 묘소 딸과 외손자 율곡 성취 영향
외조부모 묘소 풍수 영향 조부모와 동일
사임당 부친 묘 대명당·모친 묘 천하대지
율곡 조부모 묘소 대흉지… 수명 악영향

▲ 명당에 자리한 강릉 죽헌동의 오죽헌

2009년 5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의 초상이 실리면서,5000원권의 율곡과 더불어 모자(母子)가 동일 시기에 유통화폐의 인물로 선정되는 진기록을 세웠다.새해 1월에는 sbs에서 신사임당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드라마를 방송할 예정이란다.이래 저래 신사임당이 새로운 조명을 받는 셈이다.율곡 이이(李珥,1536∼1584)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다.덕수이씨 대종회 홈피에는 ‘우리나라 문무(文武)를 대표하는 가문 덕수 이씨’라는 자막과 충무공 이순신과 율곡 이이의 초상이 번갈아 뜬다.어찌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는가.사임당과 율곡이 덕수 이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풍수적으로는 두 분은 강원도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강원의 인물이다.

▲ 신사임당 부부 묘소.파주 법원읍 소재.부모님 뒤로는 율곡 형님,그리고 율곡과 부인 노씨의 묘소다.

덕수 이문의 묘소가 있는 파주로 가보자.덕수 이씨의 시조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돈수(敦守)로 1218년,거란이 침입했을 때 출정했던 기사가 ‘고려사’에 실렸다고 한다.7세손인 양(揚)은 두 분의 아들을 두었으니,큰 아들의 후손에서 율곡(13세손)이 태어나고,둘째 아들 후손에서 충무공(12세손)이 태어났다.많은 풍수가들이 이양(揚)의 묘소를 대단한 명당이라고 평가하는 이유이다.장대한 후고(뒷산)에서 위이굴곡(委蛇屈曲)하며 낙맥하고 우뚝하게 재기성봉(再起成峯)한 곳에 묘소가 자리하니 먼 곳에서 봐도 대명당이란 느낌이 드는 곳이다.그러나 묘소는 핵심 혈처에서 약간 빗겨난 소지소혈(小地小穴)에 불과하다.설령 이 묘소가 대명당 이어도 7세(世) 후손인 율곡에게 주었을 풍수적 영향은 적었을 것이다.

▲ 위(뒤)로부터 증조모 해주 최씨,증조부,큰할아버지 묘소.파주 율곡리 소재.증조부 묘소가 핵심혈처에 정확히 자리한다.정승판서는 능히 배출할 역량의 혈처에 자리한다.

율곡에게 풍수적 도움을 준 묘소는 어디일까.

파주 율곡리에 소재한 증조부 묘소가 율곡의 현달과 그 형제들의 학문적 성취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나,조선시대 최고의 대학자이며 구도장원(九度壯元: 과거시험에서 9번을 1등을 함)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율곡의 발적(發迹)을 설명하기에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대관령을 넘어 사임당과 율곡이 나고 자란 강릉 오죽헌으로 가보자.오죽헌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일자(一字)형의 별당 건물로,집 뒤뜰의 검은색 대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당호(堂號)이다.오죽헌의 상속 내력이 특이하다.최응현(사임당 모친의 외조부)에서 이사온 (사임당의 외조부),신명화 (사임당 부친)로,사위에서 사위로 상속된 것이다.아들이 없던 신명화에게 둘째 사위 이원수가 처가살이를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아들과 딸의 균등한 재산상속과 처가살이의 혼인풍속은 조선중기까지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오죽헌은 명당에 자리하며,특히 율곡이 태어난 몽룡실(夢龍室)은 엄청난 대명당의 핵심에 정확히 자리한다.대관령에서 출발한 맥로가 경포 저수지의 뒤를 감고 돌아와 몽룡실에 정확히 결혈하였다.사임당이 율곡을 회임했을 때 용꿈의 태몽이 있어서 몽룡실이라고 하였고 율곡의 어릴 적 이름이 현룡(見龍)이었다.

▲ 사임당의 부모 묘소.강릉 대전동 소재 앞의 부친 신명화와 그 뒤에는 모친 용인이씨 묘소.

사임당의 부모 묘소를 찾아간다.사임당은 일곱 살에 안견의 그림을 모사할 만큼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그가 남긴 화훼초충도(花卉草蟲圖)는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풀벌레를 그렸더니 닭이 쪼아먹으려 했다는 고사가 생길만하다.그는 또한 서예와 시(詩)에도 조예가 깊었으니,어버이를 그리워하는 사친(思親)시는 중등학교 교재에서 인용되고 있다.사임당의 부친 신명화의 묘소도 상당한 대명당인데,모친 용인이씨 묘소의 역량은 천하대지를 방불한다.맥로는 당처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먼 곳에서 출발하여 경포동을 싸고 돌며 묘소의 청룡방을 거슬러 올라오다 우선(右旋)하여 이곳에 2 개의 대혈(大穴)을 맺었다.

율곡의 천재성과 구도장원의 의문이 눈녹 듯 풀리는 순간이었다.율곡에 가려서 그렇지 율곡의 큰누이 이매창도 ‘작은 사임당’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학식과 예술적 재능을 소유한 인물이었다.애석한 것은 사임당의 조부모 묘소를 보지 못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묘소들이 100년 넘게 보존되기 어려운데,이 묘소는 직계도 아닌 외손의 가문에 의해 600년이 보존되고 있는 것도 대명당이란 반증의 하나일 것이다.

# 외조부모의 묘소가 본인에게 미치는 풍수적 영향은 직계 조부모의 영향과 동일하다.본인의 자녀가 잘 되기를 바란다면 장인장모의 묘소도 부모님 묘소만큼 배려해야 하는 이유다.

외조부 묘소가 이런 대명당인데,율곡의 수명은 지천명에도 이르지 못했을까.다시 파주의 선영을 살펴보자.율곡에게 풍수적으로 가장 불리하게 영향을 준 것은 조부모 묘소(파주 율곡리 소재)다.대흉지의 핵심에 정확히 걸렸기 때문이다.율곡이 사로(仕路)에 나가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나,선조는 율곡의 의견을 채택하지 않았고,속유(俗儒)들의 끊임없는 시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게다가 부모님 묘소도 길흉이 뒤섞인 곳에 자리한다.

#자식의 묘를 부모나 조상의 묘소 뒤에 쓰면 도장(倒葬)이라 하여 불경(不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예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하나의 묘소가 길과 흉의 두 가지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다.명당은 길하게,흉지는 나쁘게 각기 작용할 뿐이다.

뛰어난 예술가이자 현모양처의 모델인 사임당,대학자이자 경세의 지도자 율곡.그들의 성취를 가능케 한 것은 강원도의 빼어난 정기(精氣)였다.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
·춘천고등학교·강원대학교 졸업
·네이버카페 ‘동강의 풍수유람’ 운영
·저서 ‘세상을 풍수로 보다’ 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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