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시대 忠節…가톨릭 전파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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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에 소재한 익평공 이계남의 묘.
 “어떤 문헌에는 평창 이씨의 시조가 고려 개국공신 이윤장(李潤張) 어른이 아니라 의종 때 태사를 지낸 이광(李匡) 어른이라고 밝힌 기록이 있던데, 문중의 입장은 어떠신지요?”
 평창군청 앞 사무실에는 이병기(李炳起) 평창 이씨 정숙공파(靖肅公派) 종친회장이 혼자 필자를 맞았다. 통성명을 하자마자 먼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영조 16년(1740년)이던가, 청곡사(靑谷寺;진주에서 마산 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서 간행한 ‘청곡사본’의 기록도 그렇고, 30년 후 1770년에 간행된 ‘경인보’에도 경주 이씨 시조 이알평(李謁平)의 후손 이거명(李居明)의 4세손 이윤장 할아버지가 평창 이씨의 시조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답니다.”
 이어서 이병기 종친회장은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덧붙였다.
 “서로 고집을 버리고 옛 문헌 기록에 근거해서 시조 어른을 하나로 통합하자고 여러 차례 회합을 시도했었지요. 그러나 결과는 아직 유보된 상태입니다.”
 2001년 2월, 평창 쪽에서 서울 흥인동에 있는 익평공파(翼平公派) 종친회 사무실을 찾아갔었다고 했다. 이병찬 종친회장을 만나서 이광을 시조로 받드는 5개파와 이윤장을 시조로 받드는 13개파, 모두 18개 계파가 한자리에 모여서 옛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시조 통합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의했는데 별 신통한 대답을 얻어내지 못하고 귀향했다. 같은 해 3월에도 1박2일 일정으로 평창 읍내 모 음식점에 모여서 논의했었고 12월에도 회합이 있었으나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불참해 통합문제는 계속 유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시조 이윤장은 고려 개국 때 태조 왕건을 도운 공로로 광록대부(光祿大夫;정1품. 영의정에 해당)에 오르고 백오부원군(白烏府院君;백오는 평창의 옛 이름)에 책봉되면서 평창을 본관지로 삼게 되었다.

8세손 이광 가문의 중흥시대

 시조의 8세손 이광은 고려 인종 4년(1126년)에 태어나 의종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府事;왕의 자문에 응하고 왕명의 출납을 맡던 종2품직), 동북면도순찰사, 평장사를 거쳐 태사(太師;정1품)에 이르렀다. 관직에서 물러나는 그에게 임금은 백오군이란 작호를 주어 낙향하게 했다.
 시조의 15세손이요 광의 8세손인 이천기(李天驥)에 이르러 가문의 명예는 멀리 명나라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 어른은 명나라 황제 주원장으로부터 1품직에 해당하는 산기상시(散驥常侍;중국 주재 한국 사신에게 내리는 최고의 벼슬)의 관직을 받았지요.”
 호는 백하(白河). 관작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까지 올랐다. 공민왕 4년(1355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명 나라 건국 직후 사신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그때 명 나라는 남만(南蠻;남쪽의 오랑캐) 토평에 국력을 쏟고 있었다. 명 나라 황제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이천기를 남만 정벌대장으로 뽑았다. 그는 2년에 걸친 토평 끝에 오랑캐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돌아왔다. 명 황제 주원장은 이천기에게 공신의 칭호와 함께 사신에게 주는 최고의 벼슬을 내렸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 보니 고려는 이미 태조 이성계의 손아귀에 넘어간 뒤였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귀국하자마자 아들 릉(稜), 곡(梏), 과(科), 세 형제와 함께 서둘러 장단으로 낙향하셨지요. 문밖 출입을 금하고 끝내 충절을 지키시다가 운명하시니 이 태조가 가상히 여겨 평창군(平昌君)에 봉하였답니다.”
 이병기 종친회장이 의미있게 웃으며 말을 마쳤다.

가문의 정신적 지주 익평공 이계남과 헌무공 이계동 형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평창 이씨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먼저, 이천기의 증손 18세손 이영서(李永瑞)다. 세종 16년(1434년)에 생원으로 알성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1446년 수찬, 주부, 이조와 예조의 정랑을 거쳐 광주목사를 역임했다. 한때 정인지의 추천으로 사가독서를 하기도 했다.
 “문중에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영자서자 그 할아버지는 글씨에 뛰어나 강희안 선생과 함께 금은(金銀)으로 불경을 쓰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서 당시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이윤균 평창 이씨 종친회 총무가 거들고 나섰다.
 노산공 이영서는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다. 맏아들 이계남(李季男)은 21세 때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풍덕 군수가 되어 토호들의 횡포를 막아내는 등 선정을 베풀어 조정의 신임을 쌓았고 성종 23년(1492년)에는 동지중추부사(정3품)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 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대사헌을 거쳐 연산군 7년(1501년) 공조참판, 1504년 호조판서에 이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무과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역임할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1506년이던가요, 중종반정 때 큰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公臣) 칭호를 받고 평원군(平原君)에 봉해지셨지요. 사후에 익평공(翼平公)이란 시호를 받으셨습니다.”
 둘째아들 이계동(李季仝)은 성종 1년(1470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훈련원 판관과 종친부 전첨, 창성부사(昌城府使)를 지냈다. 성종 10년(1479년) 선전관, 동부승지 등을 거쳐 대호군으로 통신부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오고 그 해에 윤필상과 함께 건위주(建州衛)를 정벌하여 형조참판 자리에 올랐다.
 “성종 14년(1484년)부터 성종 22년(1491년) 사이에 영안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야인들을 물리치고, 정조부사(正朝副使;신년하례 차 중국에 다녀오던 사신)로 명 나라에 다녀오고, 도원수 허종과 함께 야인 니마차를 토평하는 등 전공을 세우면서 공조참판, 이조참판, 형조판서에 이어 한성부윤까지 역임하시게 되지요.”
 이 무렵 이계동은 국조명장(國朝名將)으로 통했다. 왕명으로 이극균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와 ‘서북지도(西北地圖)’를 임금에게 지어 받쳐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사후에 헌무공(憲武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어느 분을 중시조로 봐야 합니까?”
 필자의 질문에 좀 생각을 하다가 이병기 종친회장이 대답했다.
 “그야 광자 할아버지시지요. 평창 땅에 정착하신 낙향조는 18세손 영자상자(永祥) 어른의 다섯 형제 중 넷째, 배(培)자 할아버지이구요.”
 강진 군수(공주와 부여의 일부를 일컫는 옛 지명)를 지낸 이영상은 노산공 이영서와 사촌지간이다. 이영상은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맏이 훤은 인제에 정착했고 둘째 완과 셋째 미는 정선, 넷째 배(또는 지)는 평창에, 다섯째 채는 공주에 정착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한국 최초 가톨릭 신자 이승훈 평창 이씨 익평공파 자손

 베드로 이승훈은 평창 이씨 익평공파 후손이다. 참판을 지낸 이동욱의 아들이요 정약용의 매부가 된다. 정조 4년(1780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를 결심했다. 정조 6년(1782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부친을 따라 청 나라에 들어갔다가 북경 남천주당에서 교리를 학습하고 이듬해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785년 천주교 서적과 십자가를 가지고 들어와 명례동 김범우 집에서 조선교회를 설립하여 주일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에 힘쓰시다가 관헌들의 강압에 못이겨 그만 배교한 적도 있었지만 다시 선교활동을 시작해 교주(敎主)가 되셨지요.”
 준비해온 자료를 뒤적이며 총무가 오른 손으로 성호를 긋듯 손짓을 해가며 말했다. 그 뒤 평택 현감으로 기용되기도 했으나 순조 1년(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인해 순교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曼川遺稿)’를 남겼다.
“이승훈 선생네는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해낸 가톨릭 집안으로서 근대사상을 일군 선구잡니다. 우리 가문의 자랑이지요."
 이병기 종친회장이 좀 큰 소리로 말을 마쳤다.
 그밖의 근대의 인물로는 을미사변을 계기로 스승 유인석과 함께 항일의병운동을 펼쳤던 이정규(李正奎)가 있고, 항일운동을 기록한 “종의록(從義錄)”의 저자 이병식과 “북정일기(北征日記)”를 저술해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이현근도 평창 이씨를 빛낸 인물들이다.
 현대에 와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이한림 전 건설부장관을 비롯해 이달호, 이관모, 이석봉, 이대용 같은 장군 출신들이 많고, 한양대병원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이봉모 박사, 이준 전 국방장관, 이승호 전 인제군수, 이석호 이봉균 이병기 전 평창농협조합장, 이주규 전 정선축협조합장, 이한균 전 평창축협조합장, 이동균 전 정선농협지부장, 이진수 화천농협지부장 등이 있다.
 
도움말 주신 분: 이병기 평창이씨 정숙공파 종친회장, 이윤균 종친회총무, 이용선종문.

글/사진: 소설가 최 종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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