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 폭언 일삼던 일본 교사에 저항… 춘천고 퇴학 후 만주 이주
최 후보 선대 관련기사 35여건
증조부 매일신보 평강분국장 맡아
유진면장 임기 중 호세 대납 ‘칭송’
조부 춘천고 1회 입학·을반 반장
1935년 평강서 면협의회원 당선

최재형 대통령선거 예비후보 선대는 평강군에서 살았으며 조부 최병규는 춘천고(당시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 춘천고보)에 유학한 인연으로 강원도 연고 인물로 분류돼왔다.예비후보 출정식 과정에서 명절에 애국가를 제창하는 사진과 1926년 춘천고 동맹휴학으로 퇴교된 조부 최병규를 드러내면서 오히려 조부와 증조부 최승현의 일제 협조적인 행적 의혹이 제기돼 논란이 일었다.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발급 문서 등 사료와 평강군지(1943·1984), 최 후보 부친 최영섭 자서전 ‘바다를 품은 백두산’, 조부 최병규 글을 참조하면서 국립중앙도서관과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제공하는 각종 옛신문 기사에 선대 행적이 어떻게 나타나있는지 살펴봤다.

▲ 1937년 5월 8일자 매일신보 7면에 평강의 최병규가 강원도회의원으로 출마했다는 기사가 실렸다.최병규는 2007년 백수연을 했는데 기사에 만 나이 29세로 나온다.당시 유권자는 강원도 통틀어 1700표라고 소개돼있다.유권자는 강원도민 중 극히 일부였다.
▲ 1937년 5월 8일자 매일신보 7면에 평강의 최병규가 강원도회의원으로 출마했다는 기사가 실렸다.최병규는 2007년 백수연을 했는데 기사에 만 나이 29세로 나온다.당시 유권자는 강원도 통틀어 1700표라고 소개돼있다.유권자는 강원도민 중 극히 일부였다.

1910년대 유일한 한글신문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외에는 없었다. 웬만한 사람들이 신문에 기사화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하지만 최 후보 선대 행적을 알려주는 신문기사는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35건이다. 평범하지는 않았음을 우선 신문기사는 수량으로 알려준다.우선 증조부 최승현(崔昇鉉 崔升鉉 崔山升鉉)은 매일신보 평강분국장을 맡고 있었다.매일신보가 참가자를 모집해 첫 시행한 만주지역 시찰단에 참여하고 있다.

▲ 1926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에 평강군 고삽면장 최승현이 354호 호세를 대납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 1926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에 평강군 고삽면장 최승현이 354호 호세를 대납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1917년 5월 25일자 4면의 ‘평강 시찰단원 환영회’ 기사는 매일신보 주최 남북만주시찰단원에 평강에서는 최승현과 이태윤 2명이 참가했음을 알려준다.5월 21일 평강군청 평원대에서 평강군수,평강경찰서장, 향교 직원, 학생 등 170여명이 참석해 환영회를 열었다는 내용이다.매일신보 1918년 3월 7일자 기사는 최승현이 2월 26일자로 유진면장에 임명됐다는 기사가 실렸다.이튿날인 3월 8일자에는 매일신보 평강분국장을 최승현에서 민명식으로 교체한다는 알림이 게재됐다.1921년 9월 11일 설립총회를 가진 유도천명회 평강지회 회장으로도 뽑혔다.(1921년 9월 16일자) 유도천명회를 알리기 위해 관내를 시찰하는 이기원 평강군수와 동행해 출장 중이라는 매일신보 1924년 5월 19일자 보도가 있다.

▲ 1926년 10월 춘천고(당시 춘천고보)에서는 한국인학생에대해 폭력적이었던 일본인 교무주임 축출을 내걸고 동맹휴학을 벌였다.당시 학생 4명이 퇴교당했다. 퇴교당한 학생 4명의 이름 모두 신문기사에 나오지 않는다. 퇴교학생 최갑도 외 3명 학부형들은 11월 22일 평강군에 집결한다. 집결 장소는 평강의 이회명 학생 집이었다.
▲ 1926년 10월 춘천고(당시 춘천고보)에서는 한국인학생에대해 폭력적이었던 일본인 교무주임 축출을 내걸고 동맹휴학을 벌였다.당시 학생 4명이 퇴교당했다. 퇴교당한 학생 4명의 이름 모두 신문기사에 나오지 않는다. 퇴교학생 최갑도 외 3명 학부형들은 11월 22일 평강군에 집결한다. 집결 장소는 평강의 이회명 학생 집이었다.

1924년 4월 28일자로 평강금융조합 2년 임기 감사로 취임한 사실이 조선총독부 관보 제3522호(1924년 5월 13일자)에 실렸다.이후에는 금융조합 평의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동아일보 1928년 4월 27일자로 보도된다.1927년에는 평강군학교비 평의원 선거에 당선됐다.(동아일보 3월 28일자) 평강군을 한 면 전체에 걸쳐 다양하게 현황을 소개하는 시리즈로 평강군편이 조선일보 1931년 10월 3일자와 1934년 11월 2일자로 보도되는데 최승현은 유진면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1934년 11월 2일자 전면 기사에 평강군 각계 주요인물 15명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름이 포함돼있다. ‘유학군자의 칭이 있는 씨는 항상 자선사업으로 명망이 일경에 높으니 현재 유진면장으로 있다’고 적고 있다.

◀ 매일신보 1917년 5월 25일자 4면에 실린 ‘시찰단원 환영회’ 기사.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주최로 남북만주시찰단 단원을 전국적으로 모집해 2주 일정을 시행한 시찰이다. 평강 환영회에는 최승현과 이태윤 2명이 참석했다.
◀ 매일신보 1917년 5월 25일자 4면에 실린 ‘시찰단원 환영회’ 기사.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주최로 남북만주시찰단 단원을 전국적으로 모집해 2주 일정을 시행한 시찰이다. 평강 환영회에는 최승현과 이태윤 2명이 참석했다.

유진면장으로 있으면서 호세를 대납한 기사도 있다. 동아일보 1926년 10월 9일자에 실렸다.고삽면의 최승현씨가 면내 적빈자 354호 81원42전을 전부 대납해주어 일반사회에서 칭송이 자자하다고 쓰여 있다.이 기사 게재일은 아들 최병규가 관여한 춘천고보 동맹휴학 중이었다.일제강점기에 장기간 유진면장과 고삽면장을 지낸 최승현은 1936년 4월 11일 면장직에서 물러났다. 유진면장을 그만둘 때 신임 면장과 함께 일본어신문 조선신문에 상자기사로 실렸다.(4월 18일자)

▲ 매일신보 1926년 10월 11일자에 춘천고 동맹휴학 관련 4명이 출학처분됐다고 실렸다.최병규는 회고글에서 강원도 주선으로 갑을반장 2명이 총독부 학무국장을 만났으며 서울의 고등학교 전학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한 뒤 퇴학당했다고 쓰고있다.
▲ 매일신보 1926년 10월 11일자에 춘천고 동맹휴학 관련 4명이 출학처분됐다고 실렸다.최병규는 회고글에서 강원도 주선으로 갑을반장 2명이 총독부 학무국장을 만났으며 서울의 고등학교 전학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한 뒤 퇴학당했다고 쓰고있다.

조부 최병규(崔秉圭 崔山圭二)가 등장하는 옛신문기사는 시대별로 장소가 달라진다.1920년대 춘천고로 유학했을 때는 춘천,1926년 학교에서 퇴교당해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30년대는 평강,만주국 목단강으로 이주했던 1940년대는 해림에서 행적이 나타난다.

최병규는 평강군 고삽면에서 출생, 평강공립보통학교를 나와 1924년 5월 춘천고 1회생으로 입학한다.갑·을반이 있었는데 을반 반장이었다.1926년 4월 순종 서거 때 전국적으로 추모물결이 이어진 가운데 춘천고 전학생도 학교측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장을 달고 애도에 동참했다.이어 10월에는 한국인학생에게 폭언과 멸시를 해온 일본인 교무주임(森廣美)을 배척하는 동맹휴학이 전개됐다.동맹휴학 관련 학생 4명이 새벽2시에 퇴교당했다.신문기사에는 4명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오지않는다.갑을반장이 포함됐다는 당사자 회고글이 있다. 퇴교생 복귀를 위해 학부모회까지 결성돼 학교측과 협의했으나 무산됐다. 당시 퇴학생 학부모회는 평강에서도 모임을 갖는데 최병규 집은 아니었다. 1926년 12월 3일자 동아일보 4면에 실린 ‘학교당국에 경고, 춘공고보의 동맹휴학 희생자 부형’기사에는 ‘최갑도 외 3명의 부형은 지난달 22일 평강읍내 서변리 이회명 가에 모여 무리애매하게 심야 삼경에 불법출학을 단행한 춘천고보에 경고(생략)’라고 실렸다.

◀ 1938년 6월 30일자 매일신보에 ‘평강 헌금 일속’ 에 ‘최병렬, 최병규 양씨는 가친의 회갑 축연비를 절약하야 일금 이십원을 국방비로 헌납’기사가 실렸다. 국방비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전쟁을 위한 헌금이다.
◀ 1938년 6월 30일자 매일신보에 ‘평강 헌금 일속’ 에 ‘최병렬, 최병규 양씨는 가친의 회갑 축연비를 절약하야 일금 이십원을 국방비로 헌납’기사가 실렸다. 국방비란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전쟁을 위한 헌금이다.

1926년 퇴교당한 최병규는 고향 평강으로 돌아와 결혼한다.1928년 장남 최영섭을 낳는다.최재형씨의 부친이다. 평강군 북부인 유진면 일원 200만평에 달하는 산림에 40만 그루의 낙엽송을 아버지 최병규가 조림했다고 최영섭 자서전에 실렸있으나 신문기사에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다만 1925년 최승현의 총독부 국유 임야 임산물 매각허가 관련 사실이 관보에 실려 있다.

◀ 만선일보 축하 광고로 해림촌공소 조리원 최병규(최산규이) 가 실렸다.
◀ 만선일보 축하 광고로 해림촌공소 조리원 최병규(최산규이) 가 실렸다.

1930년대는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정책이 선회하는 시대다.옛신문에는 최병규가 젊은 나이에 유진면 면협의회원 선거에 나가 당선됐으며 강원도회 의원은 낙선됐다고 실렸다.4년 임기 면협의회원에 1935년 5월 유진면에서 처음 당선됐으며 1939년 5월 재선됐다는 기사가 당시 신문에 실렸다.최병규의 형 최병렬도 고삽면에서 나란히 면협의회원에 당선 및 재선됐다.강원도회와 면협의회는 통제된 의회기구 성격으로 강원도정과 해당 면의 자문기구로 총독부 조직에 포함돼있다.1938년 최병규는 형 최병렬과 함께 부친 환갑 비용을 아껴서 일본군에 국방헌금했다는 일제측 미담 기사가 실렸다.6월 30일자 7면 ‘평강 헌금 일속’기사에 ‘최병렬 최병규 양씨는 가친의 회갑축연비를 절약하여 일금 20원을 국방비로 헌납’으로 보도됐다.

▲ 1939년 5월 29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평강군 면협의회 회원 당선자 명단. 유진면 당선자에 최병규가 있다.
▲ 1939년 5월 29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평강군 면협의회 회원 당선자 명단. 유진면 당선자에 최병규가 있다.

최병규가 만주로 이주한 것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사는 없다.다만 만주국에서 발행된 한글신문 만선일보 1940년 7월 30일자 3면에 ‘축 해림지국 발전’ 광고에 최병규의 이름이 등장한다.만주 목단강시 해림촌 공소에서 ‘조리원(助理員)’이라는 직책을 맡은 사실을 알려준다.한국인들이 이주해 형성된 해림촌공소 촌장 소춘창과 조리원 최병규 명의로 축하광고를 싣고 있다. 1941년 1월 21일자 5면 만선일보에는 조리원 사임 인사차 해림지국을 방문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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