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 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방황하는 민우. 병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사랑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힘을 깨닫는 다혜.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던 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민우는 삶의 어두운 곳으로 조금씩 미끄러져 들어가는데…

최인호가 쓴 ‘겨울나그네’는 20여년전 출간되면서 젊은층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소설이다. 모티브를 제공했던 슈베르트의 곡 겨울나그네도 더불어 주목을 받았다. ‘겨울’이라는 테마는 이처럼 문학과 음악, 미술 등 예술 전반에 걸쳐 풍부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는 매력적인 소재다. 특히 강원도의 자연이 빚어내는 겨울은 예술적인 감흥과 함께, 신비감을 전해준다. 그 신비감을 표현하는 데 음악이나 영화보다 더 강력한 예술적 장르로 ‘시’를 꼽을 수 있다. 강원도의 겨울, 강원도 시인들이 노래한 ‘겨울 시’ 속을 따라가 본다. 이수영


   


겨울길을 간다
 이해인(양구)

겨울길을 간다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겨울 나그네
 황금찬(속초)

기름 난로의 열기는
체온보다 따뜻하다.
 
마주앙 한 잔 따라 놓고
나는 어느 계절의 나그넨가.
 
휘서 디스카가
슈베르트를 노래한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려고
이 곳을 찾는 것이다.
 
노래가 끝나고 잔이 비면
다시 마주 앉는 고독
 
밤 9시 45분
거리도 잠들어 가고 있다.
 
지금 이 온실을 떠나면
나는 겨울의 방랑인
 
성에 덮인 창을 민다.
밤 바람이 나를 맞는다.
 
안녕히 가세요
소녀의 음성은 정답다.
 
삶이란 사랑인가,
그리고 주검이란 허무일까?
 
사랑과 허무는 둘이 아니라고
지금에야 말할 수 있다.

겨울 화진포
이상국(양양)

 
북으로 가는 길은 멀다
 
군데군데 검문소와 탱크저지선 지났는데도
호숫가 솔숲에서 앳된 군인이
자동소총 거머쥐고
다시 길을 막는다.
 
춥다
그대도 물은
떠도는 새들 때문에 얼지 못하고
산그림자로 겨우 제 몸을 덮었을 뿐,
 
추위 속에
잠들면 죽는다고
물결이 갈대들의 종아리를 친다
하늘에도 검문소가 있는지
북으로 가는 청둥오리 수천마리
서로의 죽지에 부리를 묻고 연좌하고 있다
 
이미 죽은 주인을 기다리며
반세기 가까이 마주 보고 선
저 역사의 무허가 건물들.
이승만과 김일성 별장 사이 불빛은 화엄인데
새떼들만 가끔 힘찬 활주 끝에 떠오르며
물 속의 산을 허문다.

겨울나무와 노교수
 이은무(춘천)

마치 철학강의를 하는 노교수처럼
경건함과 진지함의 가을나무들이지만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하루 해는
왜 그렇게 짧은지
그분의 말씀으로 비우며
떨어지는 낙엽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늘 추위에 민감한 그들에겐
오는 겨울이 또 코앞의 걱정인데, 이땅의
아침 신문과 저녁 뉴스는 춥고 어둡기만 하다
이제 곧 앙상한 나무들은,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노 교수의 쓸쓸한 뒷모습이겠지

겨울로 가는 길목에 서서
정수일(원주)

 
바라보면 외로운 치악
고둔치재 넘어
계절은 흐드러지게 오고
슬그머니 가버린다.
 
가슴 썩둑 베어져나가는
섬뜩한 아픔으로
나뭇잎은 흩어지고
왠지 모를 슬픔을 안고
네 하얀 수액은
말라버린지 오래다
 
눈물도 마른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며
가로수 밀려가듯 세월의 뒤쪽으로 멀어져 가는
당신의 뒷모습에
잠깐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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