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흥우

수필가·시조시인
농사짓기는 김장농사가 반농사라고 한다. 한 해 농사의 끝맺음을 잘 마무리하는 의미도 있겠지만 곡식을 거두어 주식거리를 해결하고 김장으로 찬거리의 대부분을 해결해야 했던 시절에서는 김장이 중요했기 때문에 갖게 된 생각이다. 어쩌다 배추가 속이 차지 않고 무가 바람이라도 드는 날에는 반농사가 낭패가 되는 것이다.

나는 군대생활을 하면서 부대부식 구매를 나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가을 김장거리로 무를 사러 나갔을 때다. 넓은 무밭이었다. 주인과 무값을 흥정하는데 선임자가 밭에서 무를 몇 개 뽑아서는 주인보고 칼로 잘라보라고 시켰다. 신기하게도 모두 바람 든 무였다. 밭주인은 얼굴색까지 변하면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바람 든 무가 많아서 무값을 제대로 줄 수 없다고 했다.

얼마 후 선임자 없이 내가 직접 무 검수를 맡는 기회가 왔다. 그의 말대로 밭에 줄맞추어선 무들의 키를 살펴보았다. 가끔 다른 무에 비하여 키가 크고 약간 솟아 난 무가 보였다. 잎도 더 푸르고 좋아보였다. 뽑아서 잘라보니 영락없이 바람 든 무였다. 장다리 만들기를 준비하느라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장다리를 막 내보내기 시작할 때 날씨가 차가워지니 성장이 멈추면서 무에 저장했던 양분을 장다리 만들기에 사용하느라고 속이 비어 바람 든 무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농사지으시는 부모님 생각이 나서 주인을 불러 불량 무를 가르쳐 주고는 골라 뽑아 버리라고 일러주었다. 무의 제값을 받게 된 나이 지긋한 주인은 고맙다면서 내가 되레 미안할 정도로 몇 번이고 굽실거려 인사를 했다.

요즈음엔 그 바람 든 무가 무밭에서는 종자 개량과 관리기술 발달로 없어지고, 사람들 중에 바람 든 사람이 끼어 있는 것 같다. 속이 꽉 차게 자라서는 먹을거리 감으로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대부분의 무와는 달리 속이 텅텅 비어 돌출된 바람 든 무같이 돌출 행동을 하는 바람 든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속빈 사람들의 행동이 속이 비어 바람 든 무와 어쩌면 꼭 닮은 꼴이다. 돌출된 것이 닮았고, 돌출했으면서 장다리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는 꽃을 피워내기는커녕 다른 무까지도 품격만 떨어트리는 것이 바람 든 무인데, 속 비고 바람 든 사람이 딱 그 짝이다.

오늘 날 사회 구석구석에서 바람 든 무 같은 사람들이 여러 사람 앞에 나서고 뽑혀서는 정상적인 무 같은 대중들을 향해서 합리성을 잃은 행동을 하고 있어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자기네들이 못다 피운 꽃을 보통사람들을 이용해서 피워보려는 심사라면 차라리 그런대로 참아주겠다. 그런데 그 것도 아닌 것 같다. 네로황제의 심리 같다고 나 할까. 되레 바람 든 짓거리를 하면서 저들만 온통 즐기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무밭에서 바람 든 무를 골라내던 내 군대선임자의 눈빛으로 속빈 사람을 골라내는 지혜 있는 지도자가 이 나라에는 지금도 많이 계시련만 그들마저 바람 든 사람들의 기세에 가려서 옴짝달싹 못하고 멀쩡한 무를 싼값에 팔아야했던 옛 농부처럼 되어버린 꼴이다.

이런 현실이 이 산골 촌로인 나만의 안타까운 마음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그저 허전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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