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끝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열흘만 지나면 절기로는 입추라 가을 문턱이 그리 먼 것도 아닌데 그 입추 뒤 말복이 또 버티고 있으니 아무래도 처서나 돼야 찜통같은 더위가 한풀 꺾이려나보다. 저 이백(李白)의 싯귀처럼 맑은 기운 감도는 소나무숲에 들어가 거추장스런 옷일랑 훌렁 벗어제치고 벌러덩 누워 '맨머리 쓸고 지나가는 바람에' 알몸을 맡기고싶은 그런 무더위다.

"땅에는 온통 더위 천지/월궁 광한전으로 달아나고싶은데 사다리가 없으니/설악산 폭포수가 생각나고/ 빙산 얼음굴이 떠오르네…" 득도해 고려 국사까지 오른 고승 원감선사도 한여름 찌는 더위는 견딜 수가 없었나보다. "지루한 여름날 불같이 타는 더위/송글송글 땀방울 등골 타고 흐를 때/시원한 바람타고 소나기 한줄기/어느덧 온 벼랑에 폭포수 드리우니/이 어찌 상쾌하지 않을소냐" 천하에 물리를 통달한 다산 정약용선생도 더위 앞에선 무력감을 느꼈을 게 분명하다. 더위를 견디다 못해 가람 이병기선생은 이렇게 읊었다. "옷을 풀어치고 일어서 거닐다가/등을 드러내고 오똑이 앉아도 보니/흐리고 터분한 머리 무겁기만 하여라"

한번 틀면 선풍기 30대분 전기가 한꺼번에 먹힌다니 벼르고 별러 장만한 에어컨도 마음대로 못켜는게 새가슴 닮은 서민들 마음이다. 쾌적한 환경에 수영장까지 갖춘데다 시절음식도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호텔피서는 그림의 떡이고. 그렇다고 좁아터진 집구석 바람한점 안드는 방에 앉아 진땀을 흘리면서 이 여름 찌는 더위를 견뎌낼 수는 없는 노릇, 돛자리 말아 겨드랑이에 끼고 수박 한덩이 사서 아들놈 손에 들려 가까운 강변이나 이름없는 골짜기라도 찾아가보자. 장마 지난 새 물에 발담그고 앉아 천천히 부채를 흔들면서 이 더위 꽁지 잡고 뒤따라 다가올 가을바람 맑은 하늘 한자락 외상으로 품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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