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발 디뎠던 정치무대를 내려 올 때 그는 "언제 어디서든 들어 쓰시는 하나님 섭리로 국회의원도 해보았다"는 말로 한국 정치에 대해 하고싶은 말을 대신했다. 망백을 넘긴 그의 노구는 더 이상 진료할 수 있는 힘도 허락하지 않았다. 70년 인술을 접을 때는 한때 의약분업사태로 병원 문을 닫던 의사들을 향해 "의사는 환자 곁을 떠날 수 없다"고 하던 때와는 달리 "죽는 날까지 환자를 돌보고 싶었는데…"라는 말로 한국 의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사양하는 것 같았다. 그의 진료실 불이 꺼진 지 만 1년, 야성(野聲) 문창모(文昌模)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판 크리스마스 실(seal) 속에서는 아기공룡 둘리가 축구를 하고 있다. 도안자인 만화가 김수정씨는 '축구로 하나되는 세계'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했었다. 올해 판 크리스마스 실은 검버섯 핀 그의 만년 얼굴을 담아 '박애로 하나 되는 세계'의 메시지를 전하자고 제안하면 어떨까. 물론 실의 창시자는 그가 아닌 덴마크의 한 우체국 직원이던 '아이날 홀벨'이다.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 발행 28년 뒤인 1932년 12월, 우리 나라에서는 황해도 해주구세결핵요양원장이던 캐나다 선교의사 '셔우드 홀'이 처음으로 실 운동을 시작했다. 그가 스파이의 누명을 쓰고 강제 추방되며 실 발행도 중단된 것을 해방 후 야성이 일으킨 것이다.

당시 "실은 결핵과 싸운다"는 광고가 나갔다. 결핵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실을 가슴에 붙여도 차도가 없자 환불을 요구했다. 야성의 얼굴이 담긴 2002년 판 실을 발행하고 싶은 것은 그의 한 세기 일대기를 어디에라도 새기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지하기만 했던 이 땅을 의술로 계몽했던 그를 요즘 한국 의사들이 다시 한번 쳐다보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더 그를 기리고 싶은 것은 그의 짧은 정치 겸업시절, 늘 국회 기도실에서 기도하던 그의 모습을 요즘 정치인들이 다시 상기하게 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咸光福 논설위원 hamlit@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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