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창수 작가

열대야와 합세해 보름 넘도록 밤잠을 설치게 했던 올림픽이 끝났다. 동메달을 놓고 벌인 일본과의 축구경기에서 승리함으로써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문자 그대로 올림픽의 대미가 화려하게 장식된 셈이다. 박종우 선수의 ‘독도 세리머니’가 뜻하지 않은 파란을 불러오긴 했지만, 세간의 화제는 단연 축구선수들에게 주어진 병역혜택. 물론 병역혜택이 그들에게만 주어진건 아니지만, 유달리 그들에게 이목이 쏠린 건 축구가 해외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인기종목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에 오르며 이미 한 차례 경험을 한 바 있듯, 그들에게 병역혜택은 일확천금의 기회와 쉽게 연결된다.

규모가 큰 국제대회에서의 메달 획득이나 입상에 따르는 거액의 포상금, 병역면제와 같은 혜택은 과거 소련과 동유럽,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체제 하의 국가들, 혹은 일부 후진국들이 행하던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오직 성과를 내기 위해 운동선수들을 정책적으로 육성하고 관리하던 엘리트체육의 산물이다. 공산주의와 대척에 있으면서도 엘리트체육을 꽤 오래전부터 시행하고, 적극적으로 ‘고무찬양’해왔으며, 선진국의 지표라 할 수 있는 OECD에 가입한 지 16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전체주의적 유산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경우는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거니와 심심찮게 국제적 농담거리를 제공하곤 한다. 당장 이번 축구팀의 경우가 그랬다. 개최국 영국을 승부차기로 물리치고 우승후보인 브라질과 준결승전에서 만났을 때 각국의 언론이 다투듯 다룬 것은 “브라질을 이기지 못하면 한국선수들은 모두 군대에 가야 하나?”라는 우스꽝스러운 기사였다. 이 기사에 담긴 불유쾌한 함의를 문제 삼은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영국을 이긴 여세를 몰아 브라질을 넘어 일찌감치 병역면제의 혜택을 확보하거나 여하히 3-4위전에서 이겨 동메달을 따낼 것인가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메달획득이 병역면제혜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일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과도한 혜택이라는 게 그 이유다. 대체 국위선양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건 차치하고, ‘상 위에 또 상’을 얹어주는 일은 상을 받지 못한 사람의 열패감을 부추기며, 미래의 꿈나무들에게 운동의 즐거움이 아니라 메달을 따내지 못하면 패배자가 될 뿐이라는 기형적인 사고를 정당화시키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메달획득과 병역면제를 맞바꾸는 ‘부당거래’가 정의의 대원칙을 무너뜨리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신성하게 져야 할 의무로부터 제외 받을 자격을 가진 국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의무를 이행하거나 수행할 수 없는 ‘예외의 사유’를 가진 사람만이 의무로부터 면제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의 학창시절, 시험성적이 상위 5퍼센트에 들지 않는 학생들에게 돌아가면서 화장실 청소를 시키던 담임선생이 있었다. “화장실 청소하기 싫으면 공부 잘해”라고 말하던 그 선생은 훗날 교육장까지 지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냄새나는 화장실 청소를 해도 괜찮다”는 당신의 비틀린 교육관은 기이하게도 대부분의 선생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다. 이것이 틀렸다는 걸, 누구나 꺼리는 화장실 청소는 똑같이 공평하게 맡아야 하는 의무라는 사실을, 그 의무로부터 단 한 사람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의가 화장실만큼 지저분해진 건 자명한 일이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에게 병역면제의 혜택을 주는 것과 공부를 잘하면 화장실 청소를 면제해 주는 것은 다른가? 이게 만약 다르지 않다면, 병역은 결코 신성한 의무가 아니다. 병역의 의무란 메달을 따지 못한 운동선수에게 부과되는 ‘화장실청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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