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창수 소설가

도올 김용옥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철학 강의에서 미묘한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을 명쾌하게 설명한 바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말년에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공은 공이지만, 과오를 과오로 인정한다는 얘기였지요. 이것은 자신과 같은 독재자가 이 나라를 통치하는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대단히 용기 있는 성찰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의미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부정투표와 재검표, 후안무치한 공약이행 포기 등으로 시끌시끌한 대선 이후의 정국에 새삼스럽게 도올의 언설을 떠올리는 것은 박근혜 후보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마치 밀물처럼 닥쳐온 일련의 우려할 만한 사태들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필자가 현역작가라 그런지, 선거 직전 한 일간지에 광고형식으로 실었던 젊은 시인·소설가 137명의 시국성명에 대한 선관위의 고발과 야당후보를 지지한 작가 이외수에 대한 무차별한 보복/음해/인신공격은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이를 두고 군부독재시절의 공안정국을 떠올리는 건 지나친 일일지 모르지만, 그 시절을 뼈저리게 지나온 세대로선 일종의 트라우마가 아닐 수 없다.

문학/예술은 생래적으로 변화에 대해, 무한히, 열려 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과학적 사실은 정신의 영역에도 어김없는 진리다. 150여 년 전에 이미 자연만이 아니라 사회문제에 대한 무거운 암시와 비전을 던졌던 <월든>과 <시민불복종>의 저자 헨리 데이빗 소로는 “이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펼치는 유일한 캔버스(This world is but a canvas to our imagination),”라고 했다. 세계는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도면에 맞추어 만들어지는 건축물이 아니라 그 시대와 의식, 감성, 열정,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이 그려내는, 무엇이 그려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대한 예술작품이다. 이런 격렬하고 활달하며 자유로운 창조의 공간을 뛰어다니는 예술가가 창조적 작업을 제한/제약/방해하는 것에 저항하는 건 당연한 일이며, 저항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진보적 의식이란 이런 당위성을 표현하는 정치적 용어일 뿐, 그 의식 자체를 정치적/이념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요즘 말로 ‘지나친 오버’에 해당하며, 예술가에 대한 폄훼에 다름 아니다.

예술가에게 있어 진보적 의식은 상식을 갖추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런 일이다. 구태의연함/고정관념/상투성은 그들에겐 목숨을 바쳐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구태의연함/고정관념/상투성에 안주하려는 대중들을 부단히 일깨우는 것은 그들이 진 최첨단의 의무에 속한다. 이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존재해야 할 이유도 가치도 없다. 예술가들로부터 저항의 정신/진보적 의식을 제한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에마저 상업주의가 판을 치는 이 천민자본주의 시대에 예술은 한낱 시정의 초라한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끊임없는 움직임과 변화는 살아있음, 즉 생명성이다. 작가/예술가에게 있어 생명성은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 아름다움[美]과 동일한 말이다. 그들의 의식을 제한하려 드는 것은 그들의 손과 발을 묶고, 입과 귀를 틀어막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더 이상 종사하지 말라는 것이고, 예술가에게 그것은 죽음이다.

공안정국으로의 회귀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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