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지은 정자(압구정)에서 사사로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한 죄로 모든 관직을 빼앗긴 뒤 사후에는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마저 절단되는 수모를 당한 인물. 세인들은 그에 대해 “사육신을 죽이는 등 악행을 일삼고 권력을 전횡한 것에 대한 업보”라고 말한다. 수양대군을 도와 정권을 창출한 1등 공신이자 세조와 예종,성종 등 3명의 군왕을 섬기며 도승지와 이조판서,병조판서,우의정,좌의정, 영의정, 원상에까지 오른 한명회 이야기다. 조선왕조 500 년을 통틀어 가장 화려한 이력을 쌓은 인물 가운데 하나지만 그의 사후는 이처럼 처참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온갖 영화(?)를 누린 한명회가 나락에 떨어진 이유가 뭘까? 일부 사가들은 그 원인을 압구정에서 찾는다. 성종 즉위와 함께 어린 왕을 대신해 정무를 맡게 된 한명회는 말년에 한강변에 호화로운 별장을 짓는다.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는 정자’라는 뜻의 ‘압구정(狎鷗亭)’이 그 것. 그러나 그는 갈매기와 노니는 한적한 삶이 아니라 민간 신분으로 외교와 국사에 간섭하는 등 국정을 농단한다. 그 끝은 앞서 언급한 그대로다. 권력의 늪에 빠져 자신의 처지를 분간하지 못한 결과!

‘압구정’의 비극은 전두환정권이 1983년 설립한 ‘일해재단’에서 되풀이 된다. 일해재단은 ‘순국사절 및 부상자와 국가유공자 자녀 교육을 위한 장학금 지원’이 설립 목적이지만 대통령의 퇴임 후를 대비한 사적인 ‘정치 공간’으로 이해된다. 5공청문회를 거치며 일해재단에 대한 실상이 빙산의 일각이나마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재단 발기인에는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을 비롯해 국내 정재계 인사가 대거 참여했고 총 598억 5천만 원의 기금이 강제(?) 출연됐다.

미르·K스포츠 등 2개 재단문제로 정국이 시끄럽다. 박근혜대통령의 말벗으로 널리 알려진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60)씨가 재단의 설립과 운영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다. 요지는 박대통령의 퇴임 후 활동을 위해 미르 등 2개 재단이 설립됐는데 최씨와 청와대가 개입, 기업으로부터 760억원을 거둬들였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현대판 ‘압구정’, ‘일해재단’이나 다름없다. 청와대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혀야 한다. 화근은 빨리 없앨수록 좋다.

강병로 논설위원 brka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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