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 춘천지법 기획공보판사

▲ 이희경 춘천지법 기획공보판사

형사재판을 한 경험에 비추어 보면,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무죄를 선고하는 때가 있다.이때 예상과 달리 무죄판결을 받은 피고인의 표정이 편안하지 않을 때가 있다.오히려 피고인이 공인(公人)이거나 지역 사회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의 경우에는 그간 자신이 범죄자처럼 낙인찍혀 입은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법정에서 호소하기도 한다.때론 재판 중인 사건의 언론 보도과정에서 혐의가 마치 유죄판결을 받은 것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 제27조 제4항은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규정하고 있다.적법한 절차와 적법한 증거에 의해 유죄가 밝혀지기 전 까지는 무죄로 추정됨에 따라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무죄추정원칙이 헌법에 규정된 것은 1980년으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고대 유럽에서는 ‘결투’라는 방식을 통한 사적 복수가 가능하였는데 급기야 복수가 복수를 낳아 사회가 큰 혼란에 빠졌다.이에 중세 유럽에서는 사적복수를 금지하고 재판을 담당하는 주체가 유무죄를 밝히는 이른바 규문주의(糾問主義)가 도입되었다.그러나 이 역시 소추권자가 동시에 심판자가 되는 구조로서,자신의 소추가 정당하였음을 스스로 입증하여야 하는 압박과 함께 구속수사,구속재판이 원칙적인 모습으로 인정되고 자백을 받기 위한 가혹한 고문이 성행하게 되었다.이제는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와 자백을 하지 않으면 ‘매우 쳐라’는 방식의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수사와 재판이 가능했던 것이다.이러한 방식과 제도에서는 피고인의 억울함이 들리지 않았고, 고문을 피하기 위한 거짓 자백의 위험성이 높아짐은 물론 인간성 자체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한편 무죄추정원칙의 기원은 고대 로마시대의 배심재판제도에서 발견되어 사실 그 연원은 오래되었다.유럽 대륙과 달리 영국의 형사재판제도는 이처럼 로마시대부터 발달한 배심재판의 토대 위에 적법절차에 의한 증거재판주의,무죄추정원칙에 따랐고, 이러한 제도가 중세 유럽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에 1789년 프랑스대혁명의 결과 탄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제9조에서 무죄추정원칙을 명시하게 된다.현재 법치주의에 의한 사법제도를 가진 대다수의 나라에서 무죄추정원칙을 널리 받아들이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무죄추정원칙에 따라 우리나라 형사재판제도는 불구속수사와 재판을 원칙으로 하고,법관은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즉,법원이 피고인에게 유죄판결을 하려면 증거에 의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범죄사실이 증명되어야 한다.그리고 그 증명책임의 주체는 피고인이 아니다.즉,피고인이 자신이 무죄임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헌법과 법률에 의해 수사권한과 기소권한을 가진 검찰이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해야 한다.따라서 증거가 부족하여 법관이 피고인이 과연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이 들면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의심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방어권을 보장한 토대위에 충분한 증거가 뒷받침된다면,무죄추정은 깨어지고 유죄로 판결할 수 있다.

적법하게 이루어진 수사와 이로써 밝혀진 적법한 증거에 의해 죄의 유무를 가린다는 점에서,무죄추정원칙은 형사재판에서 실체진실을 만나는 길과 방법을 일러주는 등불과 같다. 이처럼 무죄추정원칙은 인권과 적법절차가 보장되는 형사재판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이자 원칙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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