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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박미숙 2017년 04월 27일 목요일
▲ 박미숙   전 춘천여성민우회 대표
▲ 박미숙
전 춘천여성민우회 대표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은 제목만으로도 설레는 책이다.대형마트에서 카트에 물건을 담아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현대인의 정서와는 먼 이야기지만 이미경 작가의 구멍가게 그림은 오래된 기억을 불러낸다.군것질 거리를 사러 뛰어가던 날이나,쉰 두부를 물리러 가던 날이라거나 늦은 밤 양초를 사러가던 날까지.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다보면 그 옛날의 따듯했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책이 좋은 반응을 얻는 데는 작가와 출판사의 남다른 노력이 숨어있다.작가는 그 대로 어려운 시절을 건너왔다.IMF 외환위기 때 아파트 건설사가 부도를 맞아 시골살이를 하였고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물감냄새 때문에 그림을 잠시 중단했다.쉬는 동안 작가는 시골마을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구멍가게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고 붓 대신 펜으로 한 획 한 획 채워나갔다.낡은 구멍가게를 수십 년 째 지키고 있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공과 경쟁과 개발의 논리에 치우친 현대인들에게 정겨웠던 시절의 기억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소소한 삶의 이야기들을 회복하길 기원하며 전국 곳곳의 구멍가게를 찾아다닌 세월이 20년이다.
한편 출판사 ‘남해의봄날’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여성출판인이 그동안 확보한 거점을 내놓고 경남 통영에서 새롭게 도전한 사례다.서비스가 집중된 서울과 수도권을 떠나,지역의 자연자원과 문화예술 콘텐츠를 발굴하고 다양한 미디어로 소통하는 노력을 수년째 해오고 있다.이미경 작가의 구멍가게 그림들은 지역출판사 ‘남해의봄날’과 만나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뇌리를 쉽게 떠나지 않는다.우리도 그런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궁리도 하고,마침 그날은 시민단체 회원들이 하천 청소를 한 날이라 기분마저 고무되어 새로운 산책코스를 걸었다.하천 아래쪽의 담쟁이덩굴은 콘크리트 옹벽을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와 있었다.석사다리에 다가갈 때였다.휠체어를 탄 남자가 횡단보도를 빠르게 건너와 인도에 올라서자마자 경사로에서 주춤하며 순간 뒤로 밀릴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 남자의 휠체어를 잡았다.석사교로 연결되는 그 도로는 설계가 잘못되어 갑자기 인도폭이 좁아지고 횡단보도 앞에서 오르내리는 경사가 반복되어 보행자나 자전거 운전자들이 늘 불편을 겪는 곳이었다.
다리를 건너는 잠깐 사이에 남자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좀 전 그곳은 이전 시장에게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고쳐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부터,장애인 용품들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장애인들은 하천 산책길로 내려가기 쉽지 않다는 하소연까지.많은 장애인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고 쉽게 바뀌지 않는 현실이라 안타깝지만 그리 새롭게 들리진 않았다.그러던 참에 장애인들도 하천을 건너가고 싶은데 징검다리는 건널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그 순간 나는 그 분의 눈을 보았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먹먹했다.그동안 숱하게 산책을 하고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한 번도 그들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당장,오래된 마을이나 골목이 이야기를 담고 있고,지역의 자연과 사람들이 공존하는 이야기를 궁리하면서도 휠체어가 그 마을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그림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굽이굽이를 넘어간다.그것은 생로병사이면서 무수한 갈등과 고난들이기도 하다.그 시련의 다리를 화가가 건너가고,그 도전의 징검다리를 출판인도 건너간다.장애인들도 그들 인생의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고,하천의 징검다리도 건널 수 있어야 또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돌아보는 4월이고,‘장애인의 날’을 다시 이틀 지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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