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벼슬을 다시 탐하다

남궁창성 webmaster@kado.net 2017년 07월 20일 목요일
▲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허균(1569~1618년)은 편지를 썼다.‘이조판서를 만났더니 동몽교관 벼슬로 권필을 굴복시키려 하더군요.그가 과연 나올까요? 형께서 한번 물어봐 주십시오.벼슬이란 때로는 가난 때문에도 하니까요.’ 권필(1569~1612년)의 뜻을 걱정하고 선배 조위한(1567~1649년)

에게 보낸 짧은 글이다.다른 친구인 이안눌(1571~1637년)은 권필의 생활을 걱정하며 이제 벼슬에 나가라는 시를 보냈다.문인가의 수재였던 권필은 열아홉이 되던 해 과거에서 장원을 했다.하지만 기휘(忌諱) 한 자로 명예를 박탈당했다.그뒤 벼슬과 절연하고 과거장을 얼씬거리지 않았다.

권필은 답을 냈다.‘과거에 응하라는 말씀으로 날 깨우쳐 주었는데 실로 서로를 잘 안다면 그같이 말할 수는 없습니다.어찌 이런저런 말 많은 자들 때문에 초심을 바꾸겠습니까.나는 옛 책 몇 권으로도 혼자 즐기며 살 수 있고 내 시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스스로 시름을 덜 만은 합니다.살림이 비록 가난해도 막걸리를 댈 수는 있으니 늘 술잔 잡고 시를 읽고 있노라면 절로 흥에 취해 나이드는 것도 잊습니다.’ 과거를 권하는 선배 허잠(1540~1607년)에게 보낸 편지다.권필은 세속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대문이 으리으리한 집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침을 뱉고 누추한 골목에서 이엉으로 지붕을 엮은 집을 보면 언제나 서성이다 돌아보곤 했다.그는 광해시절 외척의 전횡을 풍자하는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가 귀양길에 숨졌다.세한에 송백같은 43년의 삶이었다.

허균과 권필은 지기였다.집안은 동인과 서인으로 당파가 달랐지만 성격은 비판적 세계관이 같았다.허균은 친구를 이렇게 평했다.‘천하의 높은 선비로 그의 재주는 진실로 뛰어났다.벼슬하여 포부를 펴는 것을 마다하고 궁벽한 시골에서 굶으며 사는 것을 달게 여겼다.’ 또 다정다감한 편지로 만나곤 했다.‘연못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버드나무는 푸른 빛이 더욱 짙어졌네.연꽃은 붉은 꽃잎을 반쯤 터트리고 푸른 나무가 비취색 해 가리개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네.마침 동동주가 알맞게 익어 우윳빛으로 항아리에 넘실대고 있으니 빨리와서 맛 보셔야 할 걸세.벌써 바람 잘 드는 마루를 닦아 놓고 기다리고 있네.’

이 아침 옛 사람들 일을 생각하는 이유는 세상 돌아가는 형편 때문이다.얼마전 국방부·노동부 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여·야가 전선을 형성했다.한 사람은 물러나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양해하는 선에서 대치는 일단락됐다.이 과정에서 대통령은 새 정부에 일할 조직과 예산이 없다고 엄살을 부렸다.야당은 대통령이 보은·나홀로·코드 인사를 고집한다며 강짜를 부렸다.강원도는 서울본부장 인선을 둘러싸고 낙하산·회전문·위인설관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종9품 미관말직을 놓고 친구는 지기의 뜻을 걱정하고 딸깍발이 선비는 손사래를 치며 시골로 달아나던 모습은 영 비현실적이다.자리보다 사람을 먼저 챙기는 인사권자와 자질보다 권세를 탐하는 벼슬아치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 더 익숙하다.포의(布衣) 권필은 이런 꼴을 보면 통곡헌(慟哭軒)에 들어 서럽게 울까,아니면 굴원(屈原)이 그랬듯 가슴에 바위를 안고 물로 뛰어들까. 남궁창성 서울본부 취재국장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http://www.kado.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HOT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