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예언했던 관상감 묘소, 오랜 세월 명성 회자
명종 사망·선조 즉위·왜군 침략 예측
울진 수곡리 소재 묘소 상당한 명당
무자손에도 향불 꺼지지 않는 자리
격암 남사고 (南師古·1509~1571)의 증조부는 울릉도를 토벌할 때 공을 세운 무장이었고, 조부 남구주(南九疇)는 정4품 의정부 사인(舍人),아버지 남희백(南希伯)은 이조좌랑을 지낸 문인이었다.어려서는 집안이 가난해 서당을 다니지 못해 독학으로 책을 읽고 오묘한 학문의 경지를 터득했다. 장성하여서는 주천대와 남수산 기슭에 살면서 명사들과 교분을 쌓기도 했다.
과거에는 여러 차례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했다.55세 때에 천거로 9품 사직참봉을,선조 때는 6품인 천문교수에 임명되었다.관상감에 재직하고 있던 어느 날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사직한 뒤 1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남사고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다.남사고가 열다섯살 때 불영계곡에서 운학도인(雲鶴道人)을 만났는데 도인은 그를 보자 “동방의 기재가 여기 있었구나!”하고 감탄했다고 한다.운학도인은 남사고에게 비서(秘書) 두권을 전해주는데,복서(卜筮·점괘)와 상법(相法·관상)에 관한 책과 천문과 역학의 비서였다.운학도인은 “책의 내용은 천기(天氣)에 관한 것이니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된다.만일 이를 지키지 않으면 집안의 대가 끊기는 화를 당할 것”이라며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이 책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책을 받은 남사고는 수 년에 걸쳐 공부하여 관상으로 사람들의 앞날을 점치고 복서로 길흉화복을 예언하였다. 또한 풍수지리를 터득하니 간룡(看龍) 장풍(藏風) 득수(得水) 정혈(定 穴)의 묘를 깨치게 되었다.
남사고가 당대에 했었다는 예언을 들어보자.
‘오래지 않아 조정은 동서로 분당(分黨)될 것’이란 예언이 유몽인의 어유야담(於于野談)에 실려있다.또한 명종의 사망과 선조의 즉위도 예측했다고 한다.그가 남산에 올라 살펴보니 “왕기가 흩어져 사직동으로 옮겨가는구나.”라고 했으니,그의 예언처럼 명종은 후사가 없이 사망하고 사직동에 살던 하성군 균(鈞)이 보위를 물려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남사고는 인류 최대의 예언가라는 프랑스의 노스트라다무스(Nostramus : 1503~1566)와 생몰연대가 비슷하다.16세기 유럽의 역사를 이끈 천하의 여걸 카테리나는 남편인 앙리2세의 냉대를 받았지만 황실을 이을 후손을 낳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이 때 그녀가 가장 신뢰했던 점성술사 노스트라다무스를 초빙하여 처방을 받는다.노새의 오줌을 받아 마시라는 처방이었다.그 처방과 예언처럼 카테리나는 많은 자녀들을 낳았고 세 아들이 차례로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구비문학을 연구하는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남사고의 ‘구천십장’이야기는 초월적 능력을 지닌 명풍수가 명당을 얻는데 실패하고 화를 당했다는 ‘명풍수 좌절담’이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지나친 욕심에 대한 경계와 천지자연에 순응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경고라고 평했다.이런 평가에다가 남사고가 후대를 잇지 못한 것을 구실삼아 남사고가 명당을 잡지 못했다고 단정하고 이에 동조하는 풍수가들도 많다는 것을 첨언한다.과연 남사고는 온갖 노력에도 명당을 얻지 못하고 아버지를 흉지에 모셨을까.
울진 수곡리의 남사고 선영으로 가보니 이 묘소는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팻말이 있었다.그러고 보면 남사고는 구천십장한 일이 없었다는 말이다.그리고 비룡상천이란 내룡이 입수(入首)하기 직전에 급하게 떨어졌다(跌斷)가 다시 우뚝 솟아오르는 형세를 말한다.그러나 이곳은 후룡(後龍)이 완만하게 내려왔으니 비룡상천에 해당하지도 않는다.또한 남사고가 과욕을 부린 탓에 화를 당하는 자리로 부친을 모신 것처럼 전해지고 있지만 묘소는 명당에 자리한다.다만 명풍 남사고의 성가(聲價)에는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수곡리에 소재한 남사고의 묘소는 명성에 부합하는 상당한 역량의 명당이다.맥로는 앞의 조산(祖山) 뒤에서 출발하여 묘소의 청룡방을 크게 환포하여 내려오다 묘소에 정확히 혈을 맺었다.풍수에는 자손이 없어도 오랜 세월 향불이 꺼지지 않는 소위 무자손천년향화지지 (無子孫千年香火之地)가 있다.회암사의 무학대사 부도탑과 전북 만경,성모암의 진묵대사 모친 묘소가 그렇다.직계 자손이 끊어졌음에도 남사고의 묘소를 찾는 사람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의 명성이 회자되는 것도 위와 같은 사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