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출신의 콜럼버스가 1492년 포르투갈과 항로 경쟁관계에 있던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신대륙을 발견했다.유럽의 많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던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흘러오는 막대한 재화의 힘으로 영국에 앞서 일몰(日沒)없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그러나 종교재판이 변곡점이었다.스페인 종교재판의 시작은 주로 유대인과 무슬림을 대상으로 하였다.종교개혁이후 16세기에 들어서면서 개신교도에 대한 억압이 시작되었다.종교의 자유가 제한되었으며 종교재판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30만 명이 넘었다.계몽주의 철학자나 과학자들도 비판해 스페인에서는 17세기에 과학적 합리주의가 확산되지 못했고,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 금서목록을 만들어 서적을 검열하는 등 출판의 자유도 제한했다. 스페인의 번영은 여기서 멈추었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의 지도자들과 상공인들은 종교적 자유가 국가발전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덜란드는 ‘누구나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어느 누구도 종교의 이유로 심문을 받거나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그러자 스페인 등지에서 의사,과학자,상인,금융업자 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출판의 자유를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하였다.종교적 이유에서 망명할 필요가 없는 지식인과 문화인들도 자유로운 분위기에 끌려 네덜란드를 찾았다.종교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온 많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경제기적을 만들었고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평창올림픽 문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라는 외신보도가 있었고 국민 10명 중 8명 이상이 이번 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평가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성공요인으로 북한참가,개·폐회식,대표팀 선전 등이 있지만 1만 6000여 자원봉사자의 헌신적인 활약을 우선 꼽아야 한다.올림픽 기간 중 새벽에 올림픽파크를 걷는데 어린 자원봉사 여학생들이 추위 속에서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이 광경을 보고 1020세대는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고정관념을 버렸다.아이스하키 경기를 보고 나오면서 자원봉사자 등이 외국인과 영어로 당당히 소통하는 것을 보면서 자유와 자유의 위대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