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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있었다 사람이 지났다 사연이 남았다

[주말매거진 OFF] 강릉 가을 명품길

최동열 dychoi@kado.net 2019년 09월 26일 목요일 12 면
▲ 대관령 옛길.해마다 가을이면 아흔아홉굽이 고갯길에 단풍 잔치가 요란하다.
▲ 대관령 옛길.해마다 가을이면 아흔아홉굽이 고갯길에 단풍 잔치가 요란하다.


가을은 ‘길’을 만나 비로소 완성된다.길로 나서야 진짜배기 가을과 조우할 수 있다.
길을 말하자면 강릉을 빼놓을 수 없다.강릉의 길은 구불구불 산 고개를 넘고,호수의 잔물결을 어루만지고,수평선 아득한 바다에 이르러 쉼표를 찍는다.

그 길에 가을이 내려앉아 단풍 잔치를 벌이면,여행자는 별천지를 목도하게 된다.백두대간 고갯마루에서부터 대행진을 시작한 곱디고운 추색(秋色)이 바다를 향해 느린 발걸음을 재촉하면,그 길을 따라 나선 여행자가 할 일은 그저 감탄사를 흘리는 일 뿐이다.

강릉의 길 위에는 또한 가을 만큼 진하고 흥미로운 스토리가 넘쳐난다.화롯불 속 역사의 재를 들추고,잘 익은 고구마를 꺼내 먹는 달콤함이라고나 할까.강릉의 명품 길에 깃 들어 있는 이야기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가을길 여행을 나서보자.

#대관령 옛길
아흔아홉굽이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책갈피를 넘기듯 펼쳐진다.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인 신사임당은 대관령 고갯길을 넘다가 어머니가 계신 북촌(北村)을 굽어보며 ‘사친시(思親詩)’를 남겼다.

옛길에는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마음,돌아보니 북촌은 아득한데,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라는 내용의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시비가 세워져 있어 사임당의 절절한 사모의 정을 확인할 수 있다.

대관령 고갯길 때문에 두번 죽임을 당한 관찰사 고형산(高荊山·1453∼1528년) 이야기도 심금을 울린다.조선 중종 때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선생은 험준한 대관령에 길을 개통했다가 뒷날 오랑캐들의 침입로가 됐다는 이유로 사후(死後)에 임금의 분노를 사 묘가 파헤쳐지는 등의 홍역을 치렀다.후일 대관령 길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무고함이 입증되고 재평가되면서 위열공(威烈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지만,백성들의 편리를 챙기다가 험한 처지에 몰린 목민관의 옛 이야기에 대관령 고갯길의 애환이 진하게 배어난다.

옛길 중턱에서는 ‘기관(記官) 이병화(李秉華) 유혜 불망비’를 만날 수 있다.조선 순조 때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이 비는 겨울에 고개를 넘다가 얼어 죽는 사람이 많이 생기자 강릉의 기관 이병화가 반정에 주막을 짓고 나그네들에게 침식을 제공한 덕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옛길 초입 ‘원울이재(員泣峴)’는 서울에서 600리 머나먼 강릉 땅으로 부임하던 사또가 고갯길에서 서러움에 눈물을 쏟고,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수려한 경관과 후덕한 인심에 반해 다시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에서 비롯됐다.

대관령은 또한 ‘천년 축제’ 단오제가 시작되는 국사성황당과 산신각이 터를 잡고 있고,단원 김홍도가 취한 듯 화폭을 펼친 곳이기도 하다.

▲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모정탑길은 불가사의한 3000개 돌탑과 함께 가을 단풍으로 특히 유명하다.
▲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모정탑길은 불가사의한 3000개 돌탑과 함께 가을 단풍으로 특히 유명하다.


#모정탑(母情塔)길

3000개 돌탑으로 유명한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의 명소다.단풍철이면 모정탑길 계곡 전체가 불타듯 화려하게 변신한다.

남한강 상류 송천과 노추산 자락 1㎞ 계곡을 따라 3000여개에 달하는 돌탑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이 불가사의한 길은 가정의 평안을 기원하며 한 어머니가 26년 간 혼자 힘으로 쌓아 올린 기적의 산물이기에 더욱 감동적이다.돌탑을 쌓은 주인공은 강릉에 살던 차옥순 여사(지난 2011년 별세).

차 여사는 꿈에 현몽한 산신령으로부터 “깊은 산골짜기에 돌탑 3000개를 쌓으면 집안 우환이 사라지고,편안해 질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지난 1986년부터 이곳 노추산 계곡에 찾아들어 26년 간 돌탑 쌓는 일에 매달렸다.계곡의 가장 깊은 곳에는 차 여사가 돌탑을 쌓으면서 기거한 오막살이 움집을 만날 수 있는데,비좁기 이를데없는 움막이어서 차 여사가 첩첩산중에서 홀로 얼마나 심한 고초를 감내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예전에는 비닐과 나무판대기 등으로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움막이었는데,지금은 대기리 주민들이 너와집 형태로 재현해 놓았다.

3000개 돌탑길의 애틋한 스토리와 아름다운 풍광이 입소문을 타면서 모정탑길은 단번에 탐방객이 몰려드는 명소가 됐다.매년 입시철이 다가오면 송천 강변 주차장에 빈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장사진이 펼쳐진다.모정탑길을 품고 있는 노추산(해발 1322m)은 예로부터 공부하는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우리 역사에 이름을 떨친 설총과 율곡,두 천재가 공부한 곳인데다 두분을 모신 사당 ‘이성대(二聖臺)’가 정상 즈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시험을 앞둔 기원의 명소로 유명세를 더했다.산 이름도 공자와 맹자를 낳은 ‘노(魯)나라’와 ‘추(鄒)나라’에서 따왔다.

모정탑길 인근의 ‘안반데기’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국내 최대 규모 고랭지 채소단지로 유명한 안반데기는 해발 표고가 1100m에 달해 하늘 아래 첫 동네,구름도 쉬어가는 곳으로 불린다.과거 화전(火田)으로 일궈낸 드넓은 고원이 하늘과 맞닿은 경이로운 풍광을 연출,사진작가들이 손꼽는 출사지이기도 하다.안반데기 일원에는 ‘구름도 노닐다 가는 길’ 이라는 뜻의 ‘운유(雲遊)길’도 조성돼 있다.

▲ 강릉 정동진∼심곡항을 연결하는 바다부채길에 가을이 내려앉으면,감탄사 가득한 풍광이 연출된다.
▲ 강릉 정동진∼심곡항을 연결하는 바다부채길에 가을이 내려앉으면,감탄사 가득한 풍광이 연출된다.

#바다부채길

해돋이 명소인 정동진∼심곡항 사이 바닷가에 2.86㎞ 길이로 조성된 바다부채길은 바다도시 강릉의 가을 매력을 뽐내는 ‘끝판왕’이라고 할 만하다.먼 옛날 동해 지각변동의 여파로 생겨난 해안단구지대(천연기념물 437호)여서 ‘동해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곳’으로 통한다.분단 이후 군(軍) 경계를 위한 순찰로로만 사용된 전인미답(前人未踏) 비경을 만난다는 설렘까지 더해져 전국 도처에서 탐방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탐방로는 1년 9개월 공사 끝에 지난 2016년 10월 개방됐다.길을 내는 공사는 난공사 중의 난공사였다.해안단구의 직벽을 파도가 거침없이 때리는 지형적 여건 때문에 육로 접근이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모든 장비와 물자는 해상 바지선을 이용해 공급했고,인부들의 등짐 사투가 이어졌다.그렇게 힘겨운 수고끝에 비경이 열리자 사람들은 환호했고,구름 인파가 몰려들면서 바다부채길은 단번에 ‘대박’ 명소가 됐다.

‘바다부채길’ 이라는 이름도 길의 유명세를 더하는데 한몫했다.강릉 출신 소설가 이순원 씨가 제안한 ‘바다부채길’은 정동진의 ‘부채끝’ 지명과 함께 탐방로가 있는 해안단구의 지형이 마치 동해바다를 향해 부채를 펼쳐놓은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 이름지어졌다. 최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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