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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당선작] 정성을 다하는 생활

이수안

데스크 woojuin1221@naver.com 2019년 10월 10일 목요일 12 면


운전을 하다 횡단보도 앞에 정차할 때,지금 액셀러레이터를 꽉 밟는다면 길을 건너는 저 사람들 중 서넛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런 생각에 혼자 놀라 브레이크를 꽉 밟곤 한다. 내가 횡단보도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살의가 아니라 공포다.혹시라도 예기치 못한 이유로 내 오른발에 갑작스런 압력이 가해진다면?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브레이크와 액셀을 혼동한다면?게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급발진 사고도 종종 일어나니까.연수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네 차가 사람을 치어 죽인다고?저기 지나가는 사람이 네 차를 치어 죽이겠다.

차창 밖으로 과도한 근육질 남자가 피트니스 전단을 나눠주고 있었다.내 차는 국산 경차 중에서도 배기량이 가장 작은 급이었고 작년에 중중고로 구입할 때 이미 이십만 킬로를 찍은 상태였다.그것은 지구 다섯 바퀴에 해당하는 거리다.이 작은 자동차가 그토록 달리고 또 달렸다니,너무 혹사 아닐까.나는 악당 타노스가 무지막지한 악력으로 내 차를 짓이기는 장면을 상상했다.그리곤 샐쭉해진 기분이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연수는 말도 안 되는 걱정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고 조금 부드러워진 말투로 나를 달랬다.연수는 모른다.세상엔 말도 안 되는 일이 셀 수 없이 일어난다.하지만 연수는 좋은 사람이니까,말도 안 되는 일 따윈 당하면 안 되니까 나는 가만있었다.

나는 기어를 P로 바꾸고도 오른발에 힘을 꽉 주어 브레이크를 압착했다.왕복 육차선 도로의 횡단보도가 몹시 길게 느껴졌다.사람들은 평온한 표정으로 길을 건너고 있었다.녹색 보행신호가 점멸될 때마다 숫자가 일초씩 줄었다.육초밖에 안 남았는데 젊은 연인이 횡단보도에 진입하더니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그들보다 더 걱정스러운 건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였다.부메랑처럼 굽은 몸으로 빈 유모차를 밀며 제자리걸음을 했다.일초 남았다.젊은 연인이 할머니를 앞질러 결승선을 통과했다.녹색 점멸등이 아웃을 선언하듯 한순간에 붉게 변했다.이게 게임이었다면 할머니는 죽었을 것이다.정해진 시간이 끝나면 순식간에 살얼음판으로 변해버리는 도로 위에서 사람들은 이토록 느슨하게 길을 건넌다.말도 안 되는 세상 일 따윈 전혀 모른다는 듯 무구하고도 나른한 표정으로.



육차선 도로에서 우회전을 하면 차선도 없는 비좁고 울퉁불퉁한 시장골목이 나온다.맞은편 차들과 보행자들을 이리저리 피해 다시 우회전하면 그 길 끝에 엄마의 분식점이 있다.마주 오는 차가 있을 경우 후진으로 백 미터 정도 빼줘야 하는 난감한 코스였다.차를 몰고 골목길에 들어서면 나는 앞 유리에 빨려 들어갈 듯 상체를 운전대에 바짝 붙이고 눈동자를 굴리며 좌우를 살폈다.큰 트럭이 맞은편에서 달려오지는 않을까,이어폰을 꽂은 채 무심히 횡단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강아지나 어린아이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쩌나 긴장하면서.한번은 생선가게 할머니가 급하게 달려오다가 내 차 사이드미러에 왼팔이 부딪힌 적이 있었다.너무 놀라 차를 세우고 할머니를 불렀지만 그녀는 내 말을 못 들었는지 계속 뛰어가 앞서가던 여자를 붙잡는 것이었다.나는 두 사람이 옥신각신 한 끝에 할머니가 천 원짜리 한 장을 여자로부터 건네받고 득의양양하게 돌아서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할머니!

오야!

팔 괜찮으세요?

할머니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좌판에 서 있던 아기엄마에게로 달려가 흥정을 시작했다.오늘 갈치 좋아요.생물 육천 원,냉동 사천 원!

나는 뒤에서 빵빵대는 자동차들 때문에 얼결에 다시 차를 출발시켰지만 한동안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잠시 후 옆자리에 있던 연수가 말했다.사이드미러 접혔어.펴고 해.

나는 창문을 열고 할머니의 팔이 접어놓은 사이드미러를 힘주어 밀쳤다.그 사건 이후로 시장골목에 들어서면 부쩍 긴장했고 생선가게 할머니를 마주칠 때면 어쩐지 미안해졌다.할머니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늘 ‘오야’할 뿐이지만.

대학생인 내가 자동차를 몰게 된 건 엄마의 분식점에 음식재료를 날라야 하기 때문이다.복잡한 시장 골목 끄트머리에 위치한 연지 분식까지 식재료를 배달해줄 도매업자를 우리는 찾지 못했다.처음에 엄마는 씩씩댔다.다들 배가 불렀지.차가 못 들어온다고 납품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니?

차가 들고 나기 힘든 골목인 것도 맞지만 테이블 세 개뿐인 손바닥만 한 가게라 납품량이 워낙 적기 때문이기도 했다.업자들 입장에선 그깟 양을 배달하기 위해 묘기에 가까운 배달을 하는 것이 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떡볶이소스 아저씨는 배달 온 첫 날 맞은편 자동차와 삿대질을 하며 다툰 후 배송을 포기했다.

차 빼라고! 뒤로 빼라고 이 새끼야!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어따 대고 이 새끼 저 새끼야?

이윽고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난데없이 서로 나이를 까더니(통성명까지 하지는 않았다.)어깨와 배를 위협적인 태도로 들이밀기 시작했다.팔만 더 크게 휘저었다면 ‘이크에크’ 기합이라도 넣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그 난장을 보고 난 후 엄마는 당장 수명을 다해도 이상할 것 없는 중고차 한 대를 구해왔다.조그맣고 빨간 자동차였다.나는 이십 킬로그램 떡볶이 소스를 비롯해 가래떡과 닭꼬치,만두,어묵,단무지와 일회용 용기들까지 대부분의 식자재를 연지분식에 나르는 일을 맡게 되었다.엄마는 가게를 비울 수 없었고 어차피 운전면허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뭐.다들 사정이 있는 거니까.엄마는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일’에서 ‘어쩔 수 없는 일’로 이 사건을 규정하며 종결지었다.도매업자에게 배송을 구걸하다 퇴짜 맞은 엄마가 알량한 갑에서 절대 을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큰 길 건너 아파트 상가에서 가게를 했으면 좀 좋았겠냐고 나는 투덜거렸다.거기는 동네마트에서 삼만 원 이상만 구입하면 무조건 배달해준다고 했다.임대료가 비싸서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볼멘소리를 했다.내가 철이 없어서가 아니다.열다섯 살 여름 이후로 나는 가끔씩 철모르는 소리를 하며 내 또래 아이처럼 굴어야 했다.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다.그렇지만 그런 투정에도 어느 정도 진심이 섞여 있기는 했다.

스무 살 때 면허를 따 놓고 운전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식자재를 받으러 갈 때마다 남자친구 연수를 옆자리에 태우고 다녔다. 연수가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됐고, 행여 있을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도 연수만 있다면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랄까, 연수는 탁월한 진정효과가 있는 캐모마일 같은 남자였다. 결국 손바닥만 한 분식점 하나를 운영하기 위해 세 사람의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가며 이 생활에 적응해갔다.

눈치 챘겠지만 내 이름은 연지다.연지분식점 딸 김연지.매우 아날로그적이고 레트로한 감성은 아니고,그냥 귀찮아서 그렇게 지은 거다.아홉 평짜리 가게지만 막상 오픈하려니 이것저것 챙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지은 건 내 이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우리 아빠 이름은 김연욱,엄마는 오지해이고 두 사람 이름 중 가운데 글자를 하나씩 따서 나는 연지가 되었다.

마지막 글자를 따왔으면 ‘욱해’가 되었겠네.내 이름의 어원을 알게 된 날 나는 무심코 이렇게 말했고 그 날 이후 엄마는 툭하면 나를 욱해라고 놀렸다.

욱해야.숙제 다 했냐?욱해서 안한 거 아니고?심부름 좀 시켰다고 욱해?

그러다 내가 진짜 욱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욱해가 진짜 욱했다며 깔깔거렸다.엄마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사소한 일로 잘 웃고 유치한 농담을 즐겼다.아재개그라는 것이 유행하기도 한참 전에 나는 엄마에게 그런 식의 말장난을 수천 개쯤 들었다.엄마는 골치 아픈 일도 웃으며 넘겨버렸고 어떻게든 되겠지,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같은 말을 자주 했다.삶에 대한 지독한 낙관은 때때로 무책임한 수수방관처럼 보이기도 했다.제 삶을 팔짱만 낀 채 보고 있을 수 있다니,그것은 놀라운 재주였다.

엄마와 나는 열아홉 살 차이다.나는 스물두 살,엄마는 마흔한 살.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엄마가 너를 열아홉에 낳았냐며 놀라곤 한다.그러면 나는 열아홉에 낳은 것이 아니라 스무 살에 낳았고 그래서 우리가 열아홉 살 차이라고 정정해준다.우리나라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으니까요,라고 친절하게 덧붙여 줄 때도 있다.간혹 엄마가 너를 고등학교 때 낳았단 말이냐,엄마가 너를 열여덟 살에 낳았단 말이냐,라고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그러면 나는 귀찮아져서 전자는 가십을 즐기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산수를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버렸다.이럴 때면 나도 얼마쯤은 엄마를 닮은 것 같다.쉽게 해명이나 설명을 포기하는 성향 말이다.물론 엄마라면 조금 더 긍정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쨌든 오지해씨는 나를 고등학교 때 낳은 것도 아니고,어린 날의 실수로 낳은 것도 아니며,불량청소년이나 미혼모도 아니었다.엄마와 내가 열아홉 살 차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통속드라마를 떠오르게 하는 모양이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내가 태어난 이야기는 너무나 평범해 시시하기까지 했다.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전회사의 서비스센터에 취직해 내방객 접수처에서 일했다.얼마 전까지 여고생이었을 엄마는 교복 대신 가전회사의 유니폼을 입고서(사실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유니폼은 거의 교복처럼 보였다.) 매일같이 이런 말을 되풀이 했다.

25번 고객님! 수리 받을 제품은 무엇입니까?어떤 점이 불편하셨습니까?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접수 후 바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엄마는 직장에서 가전제품 수리기사인 우리 아빠를 만나 짧은 연애를 하고 정식으로 결혼까지 한 후에 허니문 베이비를 낳았다.그것뿐이다.공교롭게도 엄마는 빠른 년생이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열아홉 살이었고,이듬해 12월에 내가 태어나는 바람에 우리는 열아홉 살 차이가 되었다.엄마는 결혼을 하고도 한참을 더 회사에 다니다가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전업주부가 되었다.이십대 초반의 여직원들이 밀고 들어와 더는 버틸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리고 해사한 애들이 접수대에 앉아 있는 게 더 보기 좋대.어쩔 수 없잖아.엄마는 그 일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고 털어버렸다.누구 보기에 더 좋다는 것인지,엄마의 십년 경력은 보기 좋음에 보기 좋게 완패당하고 말았다.퇴직한 후 엄마가 회사에서 가져온 짐 꾸러미 속에는 둥글고 노란 상패가 들어있었다.2002년에 받은 ‘미스 스마일상’이었다.귀하는 친절한 말투와 아름다운 미소로 고객을 응대하고 정성을 다하는 자세로 고객만족도 향상에 이바지한 공이 크므로 이 상을 드립니다.

엄마는 퇴직한 다음 날부터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보다도 늦게 일어나기 시작했다.마치 그동안 미뤄두었던 늦잠을 벌충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아침 햇살이 얼굴위로 점점이 쏟아질 때까지 게으름을 부렸다.미스 스마일은 미세스 늦잠이 되었다.평화롭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엄마의 늦잠은 오년 만에 끝이 났고 다시 일을 나가야 했다.우리 가정의 수입을 전적으로 맡고 있던 아빠가 더는 일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폭염주의보가 내린 어느 여름날,아빠는 에어컨을 수리하러 갔다가 고객이 휘두른 야구방망이에 맞아 죽었다.너무 더워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에어컨을 빨리빨리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수사 결과 숨어있던 한 가지 이유가 더 드러났다.수리비 십사만 팔천 원 때문이었다.담당 수사관을 만나고 온 엄마는 영혼이란 것이 쑥 뽑혀나간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고객이 수리비에 불만을 품었대.에어컨은 오래되면 부품비가 많이 들거든.



중학생이던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엄마가 ‘고객’이라고 했던 것이다.범인도 아니고 살인마도 아니고 개새끼도 아니고 고객.그는 경찰 조사에서 저도 모르게 방망이를 휘둘렀다고 했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실 바닥에 수리기사가 쓰러져 있었고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았다고.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고.그 날 이후 엄마와 나는 두 번 다시 ‘욱해’ 따위의 장난은 하지 않았다.대신 한밤중에 가끔씩 깨어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래 울었다.

캐모마일 같은 내 남자 연수는 스물 네 살이고 올해 초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육군,병장,만기,그리고 전역.이 단어들을 연수가 그렇게 조합해서 말하니까 그것이 꽤나 중요한 의미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 말들을 외워두었다.물론 내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네 단어 중 어느 것도 필요 없었다.

남친 군대 갔다 왔어?

응.갔다 왔어.

그러니까 병장 육군,아니 육군 병장 만기 전역이나 군대 갔다 온 거나 그게 그거인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다.그 단어들은 연수처럼 충실하게 국방의 의무를 다한 대한민국 남자들을 위한 용어였다.연수는 나보다 두 살이 많지만 나는 그냥 연수야,하고 부른다.

연수,연지.어쩐지 오누이 같아.내가 이렇게 말하면 연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우리는 남매가 아니라 연인이라고 목소리에 제법 힘을 주어 말했다.그러면서 오빠라고 부르라는 거였다.내 생각엔 오빠라고 부르는 게 더 오누이 같아서 나는 계속 ‘연수야’ 라고 부르기로 했다.

연수야.참 예쁜 어감이다.파열음도 거센소리도 없이 그저 바람에 흩어지는 그 소리가 좋아서 나는 자꾸만 연수야,하고 부르고 싶어진다.연수야.어디선가 생글생글한 미풍이 불어와 내 귓불을 마구 간질이는 느낌.

연수야, 우리 결혼할까.

쪼끄만 게 무슨 결혼.

뭐 어때서?우리 엄만 내 나이에 벌써 애가 있었는걸.우리도 하자.

뭐, 뭘 해?

우리도 해.

뭘 하자고?

결혼하자고!

나는 연수의 팔꿈치를 마구 간지럽혔다.연수가 못 참겠다는 듯 내 팔보다 조금 굵을 뿐인 제 팔뚝을 내 손아귀에서 떼어냈다.연수는 유독 팔꿈치에 간지럼을 잘 탔다.나는 연수의 약점을 알아챈 뒤 툭하면 팔꿈치에 다붓이 달라붙곤 했다.

제대 후 연수는 배달대행업체와 박스 공장에서 일하며 다음 학기 학비를 모으는 중이었다.유일하게 쉬는 날인 매주 금요일 오후,우리는 식자재마트에 가서 엄마가 적어준 재료들을 구입했다.내가 수첩에 적어 온 품목을 하나씩 읽어 주면 연수가 상품을 골라 카트에 넣었다.

마늘 한 접,알 꽉 차고 단단한 걸로.연수는 마늘을 골똘히 들여다 본 후 심사숙고 끝에 한 접을 골라냈다.

단무지 삼킬로 한 팩,가장 최근에 제조된 걸로.라벨을 꼼꼼히 조사하던 연수는 제조일자가 적혀 있지 않다며 유효기간이 가장 많이 남은 것을 선택했다.연수와 장을 볼 때면 우리가 꼭 가족처럼 느껴져 나는 조금 들뜬 기분이 되었다.어느 날엔가 젊은 부부가 쇼핑카트에 아기를 태우고 가는 걸 보았다.아기는 오동통한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꺄륵꺄륵 요상한 소리를 냈다.나는 연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십오개월 여자아이,볼 발그레하고 통통한 걸로.연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그런 장난하면 못써,라고 준엄한 척 말했다.

그럼 그건 자체 생산할까?나는 연수의 팔꿈치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우리는 식재료를 담은 카트를 밀고 나오다가 마트 입구에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첫 입을 베어물기도 전에 아이스크림이 녹아 흘렀다.지구가 인간을 구워먹는 거대한 화로라도 된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연수는 움큼움큼 깨물어서 금세 먹어치웠지만 나는 혀로 빙그르르 돌려가며 먹느라 절반은 녹아버렸다.

수영장 가고 싶다.연수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카트를 끌고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나는 입을 한번 삐죽 내밀고는 별 수 없이 연수 뒤를 따라갔다.신도시 외곽에 있는 이 식자재 마트에는 지하주차장이 없었다.단층으로 널찍한 마트의 앞마당이 전부 주차장이었다.내가 열여섯 살까지 살던 서울에서는 주차장이 으레 땅 밑으로 스프링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지하세계였다.자동차들은 두더지나 들쥐처럼 아래로 파고들었다.조금 큰 건물이면 지하 사층이나 오층은 기본이었다.나는 어둡고 음습한 지하주차장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같은 무더위에는 햇볕이 완벽하게 차단된 음지의 세계가 조금은 그리웠다.자동차는 불가마처럼 끓고 있었다.창문을 모두 내리고 차키를 꽂은 후 오른쪽으로 돌렸다.투르르릉,투르르릉.엔진이 늙은 염소 같은 소리를 냈다.시동이 걸리지 않았다.차 키를 쥔 손에 땀이 찼다.다시 한 번 힘을 주어 차키를 돌렸더니 ‘퓩’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꺼져버린 느낌이 들었다.나는 멍하게 연수를 바라보았다.등줄기와 이마에서 사정없이 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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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재료가 상하지 않게 연지분식으로 나르는 일이 우선 급했다.택시를 불러 박스에 담긴 물건들을 옮기는데 열기를 잔뜩 먹은 습기가 온 몸에 끈끈이처럼 달라붙었다.나는 택시를 타고 분식점으로 가고 연수는 남아서 보험회사의 긴급출동서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마트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택시에 오르며 내가 말했다.연수의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큰 길까지 카트를 가지고 나와 달라고 했다.엄마는 손님이 세 테이블에 ‘가득’ 찼다며 허둥댔다.그리고는 일단 알았으니 무작정 전화를 끊으라는 거였다.나는 더워서 일분도 못 기다리니 알아서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룸미러에서 흘끔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택시 안에서 담배 냄새가 났고 에어컨은 탈탈대기만 할뿐 냉기를 만들지 못했다.택시가 시장 입구에 다다르자 나는 엄마가 나와 있는지 보려고 창 쪽으로 얼굴을 바짝 붙였다.커다란 손수레를 잡고 골목 어귀에 서 있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세원상회 양재아저씨였다.세원상회는 연지분식 맞은편에 있는 오래된 철물점이다.양재아저씨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인데 요사이 아저씨가 나와 있는 경우가 많았다.사실 아저씨는 총각이라서 시장통 아이들은 ‘양재 삼촌’이라고들 불렀지만 나는 어쩐지 삼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아저씨는 택시를 발견하자 손수레를 밀며 허둥지둥 달려왔는데 몸 전체가 똥짤막한 엄지손가락 같았다.내가 택시비를 계산하고 내리기도 전에 이미 트렁크에 있는 박스를 수레에 옮겨 싣고 있었다.

차가 퍼져버렸다고?

내가 시무룩하게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저씨는 이런 폭염에 그런 일이 가끔 있다며 분개인지 위로인지 가늠할 수 없는 투로 말했다.양재아저씨의 철물점 수레는 쌀떡과 단무지 같은 것들을 잔뜩 싣고 덜컹거리며 시장골목을 지났고,나는 뒤에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시장 사람들이 물끄러미 이 행렬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점심으로 냉국수를 만들고 있었다.아이 둘을 데리고 온 아주머니가 막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나머지 두 테이블에 손님이 각각 두 명씩 앉아 있었다.엄마는 잰 손놀림으로 냉국수 두 그릇을 말아 테이블에 올리고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어서 앉으라고 했다.불평의 봇물이 터지기 전에 저 국수로 내 입을 틀어막으려는 거다.동치미 국물로 맛을 낸 냉국수에는 적당히 녹은 살얼음이 몇 조각 떠 다녔다.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양재아저씨는 어느새 면발에 열무를 얹어 후룩후룩 마시고 있었다.나는 잠자코 맞은편에 앉아 젓가락을 집었다.냉국수는 연수가 좋아하는 음식이다.지금 양재아저씨가 먹고 있는 저 국수는 원래 연수 몫이었을 거다.오늘 그놈의 똥차가 그렇게 되지만 않았어도.

연수가 군대에 있을 때 엄마와 함께 면회를 간 적이 있었다.엄마는 너 그거 오버하는거다,라고 했다.그러더니 면회 가던 날 아침 거울 앞에서 옷을 세 번씩이나 갈아입고,봉고데기로 뿌리볼륨을 넣고,눈썹을 그리느라 호들갑을 떤 건 엄마였다.엄마를 대동하고 나타난 나 때문에 연수는 당황했다.불판에서 익어가는 돼지갈비를 굽기만 할 뿐 제대로 먹지 못했다.그러더니 후식으로 나온 냉국수를 새까맣게 그을린 팔뚝으로 그릇째 집어 들고 국물까지 말끔히 비워냈다.

연수는 고기보다 국수를 잘 먹는구나.엄마가 이렇게 말하자 연수의 까만 얼굴이 스르르 풀어졌다.그 순간 관자놀이에 맺힌 땀방울 하나가 국수 그릇에 툭 떨어졌다.연수가 머쓱하게 웃었고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양재아저씨도 땀을 뻘뻘 흘리며 국수를 먹고 있지만 어쩐지 보는 이를 곤혹스럽게 하는 먹성이었다.엄마는 아저씨가 식사하는 내내 옆에서 살뜰하게 챙겼다.면을 다 먹으면 사리를 더 내오고 국물이 부족해지자 육수를 더 내오는 식이었다.열무까지 종지에 가득 담아 왔다.저런 식이면 끝도 없이 먹겠군.나는 생각했다.

다행히도 때마침 걸려온 전화 덕분에 국수 무한리필은 갑자기 막을 내렸다.잠깐 철물점 문을 걸어놓고 나왔는데 손님이 찾아와 연락한 것이다.아저씨가 허겁지겁 마지막 국물을 비우고 일어서자 엄마는 잽싸게 물을 한 컵 따라서 가게 문을 나서는 아저씨에게 건넸다.두 사람은 무슨 말인가를 나누더니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엄마의 얼굴에 잔잔히 퍼지는 웃음이,대기를 가득 메운 살인적인 열도를 순식간에 냉각시켜버리는 묘한 순간이었다.엄마가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이 무더위에 엄마는 어째서 웃음이 나는 걸까.양재아저씨가 큰 소리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철물점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나는 가게로 돌아온 엄마에게 아무한테나 친절하게 굴지 좀 말라고 했다.얼마간 심술궂은 말투였다.엄마는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분식집 주인이 손님한테 친절하지 않으면?나는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가 엄마가 나를 너무나 유심히 바라보았기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정성을 다하겠습니다.엄마는 회사를 그만두고도 전화를 받을 때면 습관적으로 이 말이 흘러나와 제 풀에 웃곤 했다.10년 넘게 매일같이 써오던 멘트가 입에 붙어버린 거였다.전화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무조건 수화기를 들고,정성을 다하겠습니다,ㅇㅇ전자 서비스센터 오지해입니다,라고 ‘솔’ 톤의 목소리로 말했을 것이다.서비스센터에서는 뿔난 고객들 때문에 험악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그 곳에 방문한다는 건 무언가 고장 났다는 뜻이고 물건이 고장 나면 사람 마음도 탈이 나는 거라고 엄마는 말했다.기계를 수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 고장 난 사람을 고치는 일이라고도 했다.주로 아빠에게 자기 업무의 중대성과 어려움을 호소할 때 하는 말들이긴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엄마에게도 어느 정도 진정성이 느껴졌다.아빠가 우리 곁에 있던 시절에 엄마는 늘 경쾌했고 재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낙천적이었으며 가끔은 철부지 같기도 했다.

아빠가 죽고 난 후 엄마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회사 측의 특별한 배려로 재취업이 된 거라고 했다.아빠를 죽게 만든 그 회사에 나가지 말라고 나는 악을 쓰며 대들었다. 슬픔이나 분노가 해결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기 전이었다.나는 그 회사 이름만 들어도 이렇게 슬프고 끔찍한데 엄마는 어떻게 거길 다시 나가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됐다.엄마는 아빠를 죽게 만든 건 회사가 아니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빠는 자기 일을 좋아했어.엄마는 핑계를 댔지만 결국엔 우리 두 사람의 생계 때문이었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고작 생계를 잇기 위해 생명을 앗아간 곳으로 되돌아가다니.출근하기 전날 밤,엄마는 화장대 서랍에서 미스 스마일 상패를 꺼내어 먼지를 닦고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엄마는 정성을 다하는 생활로 돌아갔다.이번에는 서비스센터가 아니라 고객상담실이었다.예전처럼 내방 고객을 대면하는 일이 아니라 전화로 접수와 상담을 받았다.전화는 하루에 수십 통씩 걸려왔다.그때마다 정성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얼굴 없는 목소리의 분노를 받아내고 자주 욕설을 들었으며 가끔 협박을 당했다.죽여버리겠다,죽여버리겠다,죽여버리겠다.이 말을 세 번 들은 날 엄마는 퇴근길에 콩나물과 두부를 사왔다.콩나물밥과 두부조림을 만들어 저녁을 먹었고,다음 날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결국 삼 개월 만에 다시 회사를 나온 엄마는 삼년이 지나도 낫지 않는 병을 얻었다.의사는 정확한 원인을 말해주지 못했다.나중에 외할머니는 그게 바로 화병이라고 했다.외할머니는 왼쪽 가슴께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여기에 뜨거운 불구덩이가 생겨 심장이 녹아버린 거다.

언젠가 청소기를 고치던 아빠가 모터가 과열되어 고장 났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심장도 기계의 모터나 엔진처럼 과열되어 터질 수 있는 것일까.아빠는 고장 난 것이라면 무엇이든 잘 고쳤다.새침해진 엄마를 삼 초 만에 웃게 하고 울보였던 나도 금방 달랬다.엄마를 낫게 하고 나를 웃겨줘야 할 사람이 별안간 사라져 버렸고 우리는 영원히 유기되었다.슬픔이나 그리움은 사위어 가거나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잘 개켜진 빨래처럼 차곡차곡 가슴 속에 층위를 만든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새로 쌓인 감정에 눌려 조금 납작해지거나 화석처럼 굳은 무늬가 되더라도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를 나온 뒤 엄마는 한동안 풀이 죽었다.우리는 범죄피해자 가족에게 무상으로 지원되는 심리 상담센터에 나갔다.상담이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지만,어느 날 무심히 틀어놓은 개그프로그램을 보다가 엄마가 풉,웃음을 터트린 이후로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여성새로일하기센터에서 엄마에게 추천해준 일자리는 죄다 전에 했던 일과 유사한 업무였다.엄마는 재취업을 포기했고 얼마 후 우리는 아빠와 살던 집을 떠났다.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 벗어나자 마트의 주차장이 한껏 넓어지는 다른 도시가 있었다.우리는 창업을 하기로 했다.세상엔 수많은 선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 선 밖으로 자꾸만 밀려났다.하지만 선 밖의 세상이 더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오히려 더 넓은 울타리 안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연수가 자동차를 폐차해야 한다고 전해주었다.고작 육 개월도 못 버티고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오토바이를 알아보고 있다며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농담인 줄 알았는데 며칠 후 정말 오토바이를 타고 연지분식에 나타났다.뒤쪽에 뚜껑 달린 배달통을 매달아 짐을 실을 수 있게 개조한 것이었다.바퀴는 두 개 뿐이었지만 젊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었다.연수는 고등학교 때 신문배달을 한 적이 있는데 보급소 사장님에게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사장님의 레슨은 세 문장이었다.키를 꽂는다.시동을 건다.두 눈을 크게 뜬다.사장님의 기막힌 레슨 덕에 연수는 금세 브레이크 잡는 법과 가속하는 법을 터득했고 점차 오토바이와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그 후로 지금까지 연수는 군대에 가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알바를 뛰었다.

엄마는 연수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고 했다.게다가 오토바이는 좀 위험하지 않니,라고도 했다.그렇지만 우리에겐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당분간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다.엄마가 배달비는 꼭 줘야겠다고 해서 연수도 그것만은 거절할 수 없었다.그래봤자 기름값,밥값 정도였다.

가장 난처한 건 사실 나였다.오토바이에 두 명이 탈 수 없어서 연수와의 금요일 데이트를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연수는 혼자서 갈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버스를 타고 연수를 쫓아갔다.처음에는 함께 못가는 게 속상했는데 따로 가서 만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마트까지는 다섯 정거장,버스 창밖으로 연수의 오토바이가 힘차게 달려 나가면 나는 다른 승객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배달을 마치고 나면 동네 공터로 가서 연수에게 오토바이를 배웠다.처음에는 오토바이를 똑바로 세우기도 힘들었다.타기도 전에 넘어지고 정강이가 까졌다.여름 내내 배웠지만 고작 공터에서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고 도로에 나갈 엄두가 안 났다.이렇게 힘든 걸 연수는 어떻게 혼자서 배운 걸까.어쩐지 코끝이 조금 찡해졌다.연수에게 들킬까봐 너는 왜 보급소 사장님처럼 잘 가르치지 못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언제부턴가 철물점 양재아저씨가 우리 가게에 수시로 드나들었다.점심은 아예 연지분식에서 해결하는 모양이었다.메뉴라고는 김밥과 떡볶이,만두랑 튀김 종류뿐인데도 맛있다며 잘도 먹었다.한번은 주방 선반걸이가 헐거워졌다며 전동드라이버와 나사를 가지고 와 고쳐주었다.그런 것쯤은 나도 할 수 있지만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엄마는 분식점에서 난데없이 삼계탕을 끓여 내왔다.

엄지손가락처럼 생긴 양재아저씨는 우리 엄마랑 동갑내기로 얼굴이 하얗고 대머리였다.일부러 삭발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다 빠져버린 건지 모르겠다.자세히 보면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어서 동자승 같기도 했다.철물점의 원래 주인인 아저씨의 아버지는 지금 건강이 좋지 않아 새 업자를 찾을 때까지 잠시 맡아주는 거라고 했다.나는 오징어 튀김을 떡볶이 소스에 찍어 먹으며 엄마에게 물었다.

그러면 전에는 무얼 하셨는데?

시를 썼대.

나는 진심으로 놀라서 목구멍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엄마가 오해할까봐 사실 양재아저씨가 너무 시인 같아서 놀랐다고 말하려는데 발작적인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엄마는 말없이 물 한잔을 내밀었다.

양재아저씨는 무언가 해탈한 것 같은 말간 얼굴,굳은 결기의 상징인 삭발 머리(혹은 탈모),그리고 음식을 대하는 열성과 경건한 자세,이런 것들이 딱 시인이 아닌가?말해 놓고 보니 농부의 이미지 같기도 하다.하긴 시인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알 길이 있나.이런 생각을 하는데 엄마가 계산대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표지가 빨간 시집이었다.

「팔월의 태양아래서 온 몸으로 울었다」

국수를 먹으며 땀을 뻘뻘 흘리는 양재 아저씨가 떠올랐다.다음 순간 선명히 솟아나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단단한 화석 하나가 불쑥 깨어난 것 같았다.

그해 여름,막바지 더위 속에서 아빠를 화장하던 날이었다.땀과 눈물로 엉망이 된 엄마가 탈진해서 쓰러지던 모습을 나는 약간 어지러운 채로 바라보았다.엄마는 누군가가 건네준 물병을 놓칠세라 꼭 쥐고 있었다.한낮의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고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엄마도 이 시집을 보고 그 날 생각을 했을까.나는 이런 마음을 털어내듯 과장되게 말했다.연수한테 아저씨가 시인이라고 말해줘야지.

맞다.연수.우리 연수가 오늘 왜 이렇게 늦는 걸까.마트에서 장을 본 후 연수는 내가 탈 버스를 함께 기다려주었다.언제나처럼 버스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고 연수의 오토바이는 부르릉 힘을 쓰며 달려 나갔다.연수는 나보다 일찍 도착하곤 했었다.떡볶이 한 접시를 다 비우도록,연수가 오지 않았다.

강아지 때문이라고 했다.큰 대로에서 시장 골목으로 꺾어지는 곳에서 목줄이 풀린 하얀색 강아지가 불쑥 튀어 나왔단다.연수는 급하게 핸들을 꺾다가 골목 어귀에 불법 주차된 자동차를 들이 받고 오토바이에서 굴러 떨어졌다.경찰관은 경미한 사고라고 말했다.나는 누구의 입장에서 무엇이 경미하다는 것이냐고 따질 뻔 했다.그는 보호자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며 신분증을 요구했다.엄마가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경찰관이 조금 머뭇거리더니 파손된 차량의 주인과 합의를 해야 하니 경찰서로 같이 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연수는 응급실 침대에 엉거주춤 앉아 있었다.동그란 팔꿈치가 하얀 붕대에 꽁꽁 싸매져 있었다.

배달통은 찾았어?연수는 나를 보자 대뜸 그렇게 물었다.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연수는 슬며시 웃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화났어?

아니.

내가 낙법을 알잖아.그래서 거의 안 다쳤어.

그 강아지는 어떻게 됐어?

주인이 쫓아와서 잘 데려갔어.

그냥 가버렸단 말이야?

연수는 머뭇거렸다.

자기 때문에 사람이 다쳤는데 병원에 데려다 줄 생각도 안하고 그냥 가버렸다고?

강아지가 어떻게 병원에 데려다 줘…

연수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날 밤 우리는 응급실에서 묵었다.혹시 모를 쇼크에 대비해 하루정도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나는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연수의 손을 잡았다.진통제를 맞은 연수가 잠이 들자 비좁은 병원침대에 기어이 올라가 연수 옆에 꼭 붙어 누웠다.온 몸에 타박상을 입은 연수의 몸이 고단한 열기를 뿜었다.병실 창 안으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손바닥만큼 내려앉았다.나는 연수의 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연수야.앞으로는 피해자 되지 마.

잠든 줄 알았던 연수가 ‘으응’하는 소리를 냈다.나는 연수 곁에서 속으로 자장자장 노래를 부르며 내일은 양재아저씨가 시인이라고 말해줘야지,생각했다.깊게 잠든 연수에게 이불을 끌어당겨 목까지 덮어 준 후 조심스럽게 병실을 나섰다.응급실 앞에서 연수의 오토바이를 찾았다.헤드라이트에 금이 가고 프론트팬더가 망가져 있었다.자동차를 들이 받은 것 치곤 양호했다.나는 연수가 앉았을 시트 위를 손으로 한번 쓸어보았다.풋스텝을 딛고 오토바이에 올라서 경찰에게 받은 열쇠로 시동을 걸었다.엔진이 거친 소리를 냈다.2단 기어를 넣고 핸들을 홱 꺾었다.

 

새벽의 도로는 어둡고 한산했다.영화 속에 나오는 무법천지의 암흑세계 같았다.노란 점멸등이 괴수의 눈동자처럼 불안하게 깜빡대고 있었다.가속레버를 쥔 손에 땀이 찼다.연수가 사고를 당한 시장골목 어귀까지 내달렸다.망가진 헬멧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나는 헬멧이 연수의 머리통이라도 되는 양 품에 당겨 쓰다듬었다.눈물이 날 것 같았다.팔월의 태양아래서 온몸으로 울었다는 양재 아저씨의 시를 생각했다.아지랑이처럼 스러져가던 엄마의 탈진한 몸도 생각했다.그 날 엄마에게 다가와 물병을 건네주던 할머니가 떠오른다.부메랑처럼 굽은 몸이 슬로모션처럼 느릿느릿 움직였고 손등에는 검버섯이 가득했다.나는 그 할머니를 알고 있다.딱 두 번 보았을 뿐이지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를 처음 본 것은 현장검증이라는 걸 할 때였다.그날 아빠를 죽인 범인을 보았다.그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완벽히 가린 채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그가 살던 빌라는 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에서 고작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웅성대는 사람들 중에는 아파트 주민들과 빌라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누군가 혀를 찼고,누군가 욕을 했다.그들 사이에 할머니가 있었다.굽은 몸으로 비틀대면서도 기어이 인파를 비집고 들어온 야윈 몸이 범인을 보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담담하던 범인의 눈빛에 짧고 강한 동요가 스쳐갔다.양쪽에서 그의 팔을 잡고 있던 형사들의 손에 긴장감이 실렸다.범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꿋꿋하게 지켜보았다.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어서 슬프지도 무섭지도 않았다.그저 너무 더워서,더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아빠를 죽인 살인범의 얼굴을 모른다.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그의 눈빛도 이제는 흐릿해졌다.나는 그의 어머니를 안다.그녀가 화장터 밖 음습한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었다.늦여름의 끈질긴 태양 아래서 노파의 움츠린 어깨가 가만가만 흔들렸다.나는 그녀가 그대로 녹아 사라지는 환영을 보았다.

육차선 도로의 횡단보도가 내 앞에 펼쳐졌다.붉은 신호등이 켜졌다.출발 신호를 받은 레이서처럼 나는 가속 레버를 쥔 손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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