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기쁨도 잠깐… 남북 강원으로 분단 아픔
미·소 양군 38선 설치 교통로·통신망 차단
‘찬탁 반탁’ 좌우 대립 원주·강릉 유혈사태

 

1945년8월15일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외세에 의해 주어진 광복은 혼란 그 자체였다. 광복의 기쁨은 잠깐 사이에 지나갔다. 해방 이후의 질서는 미군정에 의해 주도됐다. 그 사이 민족 내부의 이념 대립은 극한대결로 치달았다. 강원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관리 감독 하에 있던 강원도는 일본 패망 후 미군정 지배권에 들어갔다.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38선이 나뉘었다. 한반도가 분단되자 강원도는 전 세계 유일의 분단도가 됐다. 이 시기 강원도 역시 ‘찬탁과 반탁’의 좌우익의 대립이 충돌하며 갈등이 고조됐다. 광복 직후 미군정 상황과 좌우익간 대립 등의 시대적 상황을 재조명해 본다.

 

 


■ 38선 등장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38선’의 공식 명칭은 ‘38분계선’이다. 일본의 패망을 앞두고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만주와 한반도 동북방으로 진격할 무렵, 미군은 한국에서 600마일 떨어진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해 있었다.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한다고 해도 미군으로서는 막을 길이 없었다. 1945년 7월16일 미국이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을 만드는데 성공, 같은 해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8월10일 밤 미국은 국무성, 육군성, 해군성이 참석, 3성 조정위원회라는 긴급회의를 열었다. 일본의 항복을 전제로 한반도의 점령 전후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미 한반도 분할계획이 결정 난 상황에서 육군성 작전국 딘 러스크(후일 케네디·존슨대통령 당시 국무장관) 대령과 찰스 본스틸(후일 주한미군사령관) 대령에 의해 ‘38분계선안’이 제안됐으며 소련군도 ‘38분계선안’을 수락, 한반도 분할점령선으로 공식화 됐다.

8월15일 낮 12시, 일왕 히로히토는 방송을 통해 항복을 발표했으며 9월2일 미국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정부 대표 사게미츠가오루와 일본군 대표 우메즈미츠로우가 항복문서에 조했다. 이때 발표된 연합군 최고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에 ‘38선’이 공식 등장했다. 한반도 분할 점령선인 ‘38선’으로 민족분단이 시작된 시점이다.



■ 강원도와 ‘38도선’

‘38선’은 단순히 미·소 양군의 편의적인 임시 군사분계선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분열과 국토 분단을 가져온 역사적이면서도 ‘아픔의 선’이다. 특히 강원도는 ‘38선’으로 하루아침에 남북강원도로 두 동강이 났고 6·25전쟁의 참상을 제일 먼저 겪어야 했다.

광복직후 소련군은 38선 일대의 교통로와 통신망을 차단했다. 강원도의 경우, 양양군 현북면 일원이 8월말, 춘천군 북산면 추전리와 사북면 월평리가 9월초, 인제 남면 부평리와 신남리, 춘천 북산 부귀리가 10월초 분단됐다.

미군의 강원도 주둔은 소련군보다 후에 이뤄졌다. 9월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9일 서울에 들어갔고 춘천에는 11일이 지난 20일 주둔했다. 당시 소련군은 화천과 양양, 강릉에서 약탈을 자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9월2일에는 소련군 1개 소대가 춘천에 들어와 당시 일본 관리에게 행정권과 경찰권 이양을 요구했지만 “여기는 미군 진주지역이기 때문에 소련군에게 인계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 건국준비위원회 강원도지부 발족

1945년 8월15일 일왕의 항복 선언 4시간 전인 오전 8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중도 좌파 지도자인 여운형과 만나 행정 기구를 넘기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곧바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결성으로 이어졌다. 조선총독부 당국자들과 협상 5개 조항을 타결한 여운형은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새정부 건설에 들어갔으며 안재홍이 명명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초대 위원장은 여운형이,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백, 선전부장 조동호, 무경부장 권태석 등으로 진용을 갖췄다. 도에서는 김우종을 중심으로 강원도자치위원회가 구성된다. 도청에서도 간부진·민간 유지급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정권을 이양받고 치안유지 활동에 들어갔다. 특히 중앙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연계 건국준비위원회 강원도지부가 8월16일 발족한다. 김우종씨가 초대 건준도지부장을 맡았다. 원주와 강릉에서도 군자치위원회가 구성, 공백상태인 행정과 치안질서에 나섰다. 군자치위원회는 중앙 건준위와 군건준지부로 재편되지만 제대로 된 정보가 알려질 길이 없어 일반시민들에게 외면당했다.



■ 미군정과 강원도

강원도는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에서 임명한 손영목 지사와 일본 관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각 지역에서는 자치위원회나 건국준비위원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강원도에 미군정이 실시된 것은 9월 20일이다.

초대 강원도 군정관인 즈비만 중령은 내무, 재무, 학무, 보건에 소령급 고문관을 배치해 행정을 관리·감독했다. 자문기관으로 고문회를 두었다. 고문회는 자치위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약한 인사 가운데 지역실정을 고려, 한 군에 한 명씩의 비율로 위촉했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 최초의 한국인 지사인 박건원 강릉군자치위원장을 임명했다. 박 지사는 이어 내무부장 강치봉, 재무부장 인태식(후일 재무장관), 학무부장 이재학(후 국회부의장), 농림부장 이홍, 상공부장 이계록, 보건부장 김영일을 임명, 미군정하에 강원도정을 이끈다. 도의 모든 행정은 형식적으로는 박 지사를 비롯한 한국인 관리가 수행했다. 하지만 미군 군정관이 모든 행정을 좌지우지 했다.

박 지사가 행정을 총괄할 당시 도지사 산하에 경찰부가 창설된다. 초대 경찰부장에 조종춘(후일 도 광공부장)이 임명되고 미고문관으로 오윌트 소령이 부임한다. 조종춘 경찰부장은 후대에 ‘일제강점기 한국인 일제앞잡이 순사 930인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 강원도 좌우익 대립

1945년 12월28일 모스크바협정으로 탁치안이 전해지자 한반도 정국은 혼란에 휩싸였다. 임시정부 측에서는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했으며 이승만은 김구가 주도한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 발족했다. 강원도는 자치위원회를 중심으로 ‘신탁통치반대 강원도위원회’가 구성,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1월3일 춘천시청 자리에서 ‘신탁통치반대시민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신탁통치반대 강원도위원회’중 좌익계 인사들이 이탈,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강원도에서도 ‘좌우대립’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우익단체들은 ‘신탁통치반대 강원도위원회’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강원도지회’를 중심으로 반탁 운동을 전개하고 좌익단체들은 도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찬탁운동을 벌였다.

도내에서 좌우익간 충돌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원주다. 1946년 10월 정미소 노동자들이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지시에 따라 총 파업을 단행하자 우익단체 청년단이 정미소 노동자 지휘부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강릉에서도 좌익시위대와 우익청년단이 정면충돌했고 묵호에서는 유혈사태로 우익청년단원이 살해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민중항거’ 여파로 당시 경춘철도와 삼척철도 운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1947년 미군정의 개입으로 좌익세력들은 지하로 잠적하기 시작했다. 좌우 갈등은 1950년까지 이어지면서 결국 6·25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안은복 rio@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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