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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회담 협상과 고지전투1951년 7월 10일 마침내 정전회담이 시작됐다.하지만 회담장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포로 송환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양측은 서로 상대를 압박하고자 무력 공세도 서슴지 않았다.유엔군은 폭격기로 북한의 수풍,장진댐을 비롯한 수력발전소를 폭격했고 북한 군수공장에도 폭탄을 쏟아 부었다.공산군도 이에 맞서 지상공세를 강화하자,정전회담 기간 중 전선에서는 포로로 잡힌 병사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1951년 8월 공산군 측은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개성 일대에 대한 유엔군...
기획
데스크
2019.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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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위로 떠오른 정전협상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1951년 6월이었다.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그제야 비로소 단시일 내 서로 상대편을 군사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그런데다가 전선은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시소게임을 하는 것처럼 교착되자 국제 외교가에서는 정전논의가 슬그머니 수면 위로 떠올랐다.그 신호탄을 쏜 사람은 주유엔 소련대사 말리크였다.그는 유엔방송을 통해 ‘평화의 가치’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소련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종용하고 교전국 간의 정전협상 토의가 시작되기를 희망한
기획
데스크
201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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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길에 오른 1·4후퇴한국전쟁은 1950년 10월 하순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개입과 모진 추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951년 1월 1일 중국군 6개 군단은 38도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12월 24일,서울시민들에게 피란명령을 내렸다.하지만 백과 줄이 있는 사람들은 미리 유엔군이 전선에서 밀린다는 정보를 듣고 12월 초순부터 피란길에 나섰다.12월 말에 이르자 80만 명이 넘는 서울시민이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이들은 한강 부교와 얼어붙은 한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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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20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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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까지 후퇴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일대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뒤 전광석화처럼 북진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한국전쟁을 끝내고자 회심의 ‘크리스마스 공격작전’을 구상한 뒤 B-29 등 폭격기로 북한 지방 대부분을 초토화시켰다.그런 다음 맥아더는 1950년 11월 25일 유엔군 전 장병에게 공격 명령을 하달했다.“적은 재기할 능력이 없으니 압록강까지 진격하라! 크리스마스에는 그대들은 가족과 재회할 수 있을 것이다.”이 공격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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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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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수도 ‘수복식’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후 13일 만인 그해 9월 28일.마침내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그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후퇴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북상한 셈이다.그동안 인민군 점령지에 나부끼던 인공기는 삽시간 태극기와 성조기,또는 유엔기로 바뀌었다.그와 함께 세상인심도 하루아침에 돌변했다.9월 29일 정오에 중앙청 광장에서 서울 수도 ‘수복식’이 열렸다.그러나 서울 수복의 감격은 잠시뿐,많은 시민들은 환멸을 맛보았다.한국전쟁이 터지자 빠른 정보로 피난을 갔던 ‘도강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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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2019.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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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승부수인민군은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남짓 만에 38선에서부터 낙동강까지 해일처럼 밀고 내려왔다.유엔군 측은 속수무책으로(또는 작전상 후퇴로) 낙동강까지 밀렸다.하지만 최후의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배수진으로 친 이후, 양측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의 공방전(다부동전투)을 벌였다.그러자 전선은 교착상태로 한 달이 넘도록 양측은 지루한 소모전을 이어가고 있었다.도쿄의 맥아더는 극적인 반격 돌파구를 계속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애초 이 작전 기획단은 서해안 인천과 군산,동해안의 주문진 등 세 곳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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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201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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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계공세를 방어한 원주 저지선1951년 2월로 접어들면서 중국군은 주력을 가평~홍천 일대로 집결시키고 원산에서 재편성한 중국군 제9병단을 춘천으로 이동시키며 부대를 재배치하고 있었다.이는 중부전선에서 유엔군의 주력을 섬멸하려는 중국군 평더화이의 복안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다.즉,서부전선에서는 한강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유엔군의 진격을 막고 주력을 가평~홍천 일대에 집결시켜 양평~횡성(삼마치고개) 일대의 유엔군 진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한 것이다.중국군 제13병단은 1951년 2월 11일 밤 8시 30분 9개 사단 병력을 국군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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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현
2019.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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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남한 전역 점령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은 다섯 시간 만에 개성을,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그런데 서울에서는 사흘이나 머물렀다.그들이 금쪽같은 사흘을 서울에서 머문 것은 미처 예상치 못한 국군의 한강다리 폭파 때문이라는 설도,애초부터 서울만 점령하려 했다는 제한전쟁 설도,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에서 일제히 봉기가 일어날 것으로 판단했다는 설도 있다.즉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하기만 하면 남한 전역에서 남로당 주축으로 인민군을 환영하는 봉기가 순식간에 일어나리라고 북한 지도부는 판단했다고 한다.하지만 이는 중대한 ...
기획
박도
2019.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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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으로 진격한 소련제 탱크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이른 새벽.38선 일대에서 갑자기 포성이 천둥처럼 울렸다.인민군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일대에서 수도 서울을 목표로 해일처럼 남하하고 있었다.하지만 서울시민은 대부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그 시각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는 전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전날 저녁,용산에 새로 생긴 육군본부 장교클럽 낙성파티에서 늦도록 술판을 벌였기 때문이다.6
기획
박창현
201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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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명칭 ‘한국전쟁(Korean War)’은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멈춘 전쟁이다.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이 형성된 공산·반공 양 진영이 대립 충돌한 국제전이었다.그리하여 이 전쟁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대한민국에서는 초기부터 ‘6·25사변’ 또는 ‘6·25동란’으로 불리다가 최근에는 외국 문헌에서 ‘Korean War’를 직역한 ‘한...
기획
박창현
2019.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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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한국전쟁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현재의 기록이자 되돌려서는 안되는 과거이기도 하다.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의 실상은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던져주고 있다.강원도민일보는 신년 기획으로 박도 작가가 수년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한국전쟁 사진을 토대로 근현대사를 돌아보는 기획연재 ‘사진으로 보는 6·25한국전쟁과 근현대사’를 연중 격
기획
박도
2019.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