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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쇄환 전후 안무사·경차관 등 파견-무릉·우산, 삼봉도 등 탐색조선 태종 때 섬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쇄환(刷還)정책’으로 울릉도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켰다고 해서 조선이 동해상의 도서(島嶼)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의 극치다.역사를 살펴보면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의 섬에 조선 관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공도(空島)정책’으로 섬을 포기했다는 식의 주장이 조선의 도서 관리 정책에 대한 곡해와 왜곡의 소치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반증 자료이기도 하다.이
강릉
최동열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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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쇄환(刷還) 후 다시 이어지는 울릉도 이주 건의-‘현·읍(縣·邑)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하자’-세종, ‘왜노(倭奴)’들이 대국(大國)의 땅 이라고 여기도록 방비하라’왜구들이 극성을 부리는 등 동해바다의 혼란이 민생을 해치자, 조선은 태종 때부터 섬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육지로 나오도록 하는 조처를 하지만, 섬사람들을 육지로 불러냈다고 해서 섬을 방치해 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은 왜구들이 섬을 점거하지 못하도록 지속해서 관리를 보내 섬의 사정을 살피도록 했다. 이는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상의 도서(島嶼) 지역이 ‘조선령’이
강릉
최동열
2024.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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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군(水軍)처럼 힘들었던 군인이 또 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병역 의무는 힘겨운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시대 수군의 군역은 그 어떤 의무보다 고충이 컸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조선은 왜구들의 준동으로 해안은 물론 내륙 백성들까지 삶이 피폐해지는 등 피해가 그치지 않자, 초기부터 무술에 능한 자를 수군에서 우대하는 등 수군 무력을 증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스스로 수군이 되고자 하는 자는 거의 전무했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다반사인 데다 뱃멀미에 시달려야 하고, 고된 노동이 많은 수군의 역(
강릉
최동열
202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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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이 있으면 이를 막기 위한 방비도 강화되는 것이 상식이다. 고려말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해방(海防) 조직, 즉 동해안 수군(水軍)의 군사력도 확충된다. 조선시대 강원·경북 동해안 수군 조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척포진(三陟浦鎭)의 설립과 발전 과정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삼척포진이 조선시대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동해안 해방(海防)의 중심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삼척포진의 진영은 현재의 삼척시 정라항 입구, 육향산 부근에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관련, 과거 삼척군이 발간한 ‘삼척군지’
강릉
최동열
20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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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성하신당(聖霞神堂)’에 깃든 전설-조선시대 김인우 안무사, 울릉도 주민 쇄환 과정에서 전래-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전설로 주목울릉도는 격동의 역사만큼이나 전설·설화가 많은 곳이다.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할 당시 활용했던 나무사자가 변해 만들어졌다는 ‘사자바위’, 또 이사부에게 무릎을 꿇은 우산국의 마지막 왕 우해왕이 이사부에게 항복하면서 벗어 던진 투구가 바위로 변했다는 ‘투구바위’, 우산국이 신라에 항복할 때 나팔이 울렸다고 전해지는 ‘나팔봉’ 등 기이한 형상의 바위나 산봉우리 등은 어김없이 울릉도의 역사를 말
강릉
최동열
202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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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우·이규원·안용복 해산-해저 지명 등재-김인우는 주민 쇄환 위해 울릉도에 간 안무사육지의 산, 고개, 분지, 평야 등에 모두 이름이 있듯이 바다의 지형지물에도 이름이 존재한다. 자국의 언어로 된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주권이나 국력, 국가의 위상 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세계 각국은 육지는 물론 바다의 지형지물에도 자국 이름을 붙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07년은 매우 의미 있는 해였다. 모나코에서 열린 제20차 국제해저지명소위원회(SCUFN)에서 우리가 명명한 동해 해저지명 10곳이 국제해저지명집에 등재된 것이
기획
최동열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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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도정책(空島政策)’ 아닌 ‘쇄환(刷還)정책’-왜구 침탈로부터 주민 보호 위한 조치여진족에 이어 야만의 왜구가 횡행하면서 ‘약탈의 바다’로 변모한 동해는 고려에 이어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에도 한동안 안정되지 못했다. 고려 말보다 침입 규모나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대마도 등지를 근거로 한 왜구들이 여전히 동·서·남해를 가리지 않고 출몰해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이다.이런 상황 속에서 조선은 태종3년(1403년)에 울릉도 등 동해상 도서(島嶼) 경영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조처를 내린다. 태종실록에는 당시의 조처를 ‘강릉도(江陵道
강릉
최동열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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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 이후 조선 초까지 왜구 피해 막심-고대 삼국시대부터 왜인(倭人) 침입 기사 즐비왜구(倭寇)처럼 지긋지긋한 존재가 또 있었을까. 우리 역사는 외적의 침입, 즉 외침(外侵)으로 점철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주변 이민족들의 침략과 이에 맞서는 항전이 그칠 새 없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민초들을 괴롭혔던 전쟁을 꼽으라면 아마도 대몽(蒙)항전이나 임진왜란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13세기에 경기병(輕騎兵) 주력군을 필두로 유라시아 대륙 전역을 가공할 만한 공포 상황으로 몰아넣은 몽골의 경우 고려를 굴복시키기
강릉
최동열
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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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동여진족 침략 후 우산국 급격히 쇠락“깨진 집터가 완연하더이다,” 울릉도 사정을 전하는 고려사 고종 30년(1243년) 기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기록을 더 자세히 옮겨보면, ‘동해 가운데 울릉이라고 하는 섬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고 진귀한 나무와 해산물이 많이 산출되지만, 뱃길이 멀어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지 오래됐다. 최이(무신정권 수장)가 사람을 시켜 섬을 살펴보도록 하니 깨진 집터가 완연했다. 동쪽 군민들을 이주시켜 그곳을 채우도록 했는데, 그 후에 험한 풍파로 인해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이 생기므로 주민
강릉
최동열
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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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일본 교류 공식 사절만 34차례 기록-한번에 10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 도해(渡海)하기도예전에 TV에서 ‘대조영’ 이라는 대하 역사드라마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망국(亡國) 고구려의 유민으로 태어난 대조영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를 갈망하는 같은 처지 고구려 유민들 및 말갈인들을 규합해 나가면서 새 나라를 여는 과정을 다룬 드라마였는데, 시청률이 꽤나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드라마의 인물 소재였던 대조영이 세운 나라가 ‘발해(渤海)’라는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다. 발해는 우리가 배운 그대로 동북아의 강자였던 고
강릉
최동열
202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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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동여진족 침략으로 우산국(울릉도) 황폐화-고려 조정에서 농기구를 보내는 등 구호 조치 시행11세기, 우리 동해안과 대마도 등 동해권역을 공포에 떨게 한 동여진족들의 약탈 폐해는 주민 생활을 극도의 불안과 피폐로 몰고 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동해 한가운데에 있는 섬, 울릉도였다. 울릉도는 동여진족의 침략으로 섬의 기반이 송두리째 파괴되다시피 했다.울릉도의 피해상을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우산국(울릉도)이 동북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농업이 황폐화되므로 이원구(李元龜)를 파견해 농기구를
강릉
최동열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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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려 수군, 동여진 해적들과 일전을 벌여 대마도인 포로들을 구출하다■고려 수군, 원산 인근 해전에서 여진족 격퇴-동여진족 귀로 막고 일전 불사-적선 포획 및 잡혀가던 일본 포로 수백명 구출1019년 대마도를 초토화하고, 일본 본토인 규슈까지 공략한 동여진족들은 무사히 동북지방 본거지로 귀향했을까. 답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그들이 동해상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궤멸적 패배를 당하는 등 귀로가 험난했다고 전한다. 그들을 막아선 것은 고려 수군이었다. 고려사 현종 10년(1019년) 4월 29일 기사에는 고려 수군이 동여
강릉
최동열
202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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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여진족 동해안 약탈, 11세기 내내 이어져-1011년부터 1097년까지 침략 기록 20여 차례대마도가 여진족들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던 때, 우리 동해안 지역 또한 안전할 수는 없었다. 대마도까지 종단 항해를 하고, 울릉도를 중간 거점으로 삼은 여진족 해적들이 가까운 강원도와 경상도 동해안을 그냥 둘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동국전란사를 비롯 동해안 시·군의 향토 사료에 따르면 여진족들의 동해안 침략과 약탈은 11세기 내내 계속된다.지난 1996년에 강릉문화원이 발행한 ‘강릉시사(江陵市史)’에서 집필에 참여한 관
강릉
최동열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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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년 동여진족 대마도 침입-대마도 기록에는 ‘도이(刀伊)の입구(入寇)’-규슈까지 약탈, 수백명 포로 끌고 가대마도 역사에 ‘도이(刀伊)の적(敵)’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11세기 초 대마도를 거의 쑥대밭으로 만든 동(東)여진족을 일컫는 말이다.대마도 현지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서(史書)에는 이들 여진족들이 1019년 3∼4월에 대마도와 인근의 이키섬에 이어 규슈(九州) 지방까지 들이쳐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다대(多大)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살인과 방화, 약탈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며 섬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
강릉
최동열
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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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때 우산국 수장에게 벼슬 하사-우산국에서 입조해 토산물 진상서기 512년에 단행된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이후 우산국은 한동안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산국이 다시 사서(史書)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418년이 지난 뒤인 고려 태조 13년(930년) 때이다.고려사 태조 13년 8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기에 백길을 정위(正位)로, 토두는 정조(正朝)로 삼았다.’울릉도에서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으므로, 벼슬을 내렸다는
강릉
최동열
202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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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 마지막 왕비는 대마도 수장의 딸-울릉도에 관련 설화 구전(口傳)우산국의 옛터 울릉도에는 오늘날에도 우산국과 관련해 전해오는 전설·설화들이 적지 않다. 지난 1997년 울릉문화원은 ‘울릉문화’ 제2호를 발간하면서 우해왕과 그의 왕비 풍미녀에 관한 설화를 소개해 관심을 끌었다. 우해왕은 서기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할 당시 이사부에게 항복한 우산국의 마지막 왕이다. 그런데 설화에 따르면 왕비 풍미녀는 놀랍게도 원래 대마도 수장의 딸이었다.대마도가 어디인가. 한반도의 최남단, 대한해협에 자리 잡고 있는 섬이고,
강릉
최동열
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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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50년 삼척에서 고구려 장수 살해 사건 발생-고구려 장수왕 격노, 신라 눌지왕(마립간) 사과서기 450년, 현재의 강원도 삼척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을 격분케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412년∼491년까지 무려 79년간 왕좌에 군림하면서 고구려의 영광을 구현한 왕이다. 그렇게 힘 있는 왕의 치세에 고구려 변방의 장수(邊將)가 실직(悉直·현재의 삼척)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고구려 변장은 실직 벌판에서 사냥하던 중 군사를 거느리고 출병한
기획
최동열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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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받는 섬, ‘우리땅 독도’-독도에 관한한 남·북한이 한 목소리-연간 30만명 이상 울릉도 입도가장 작은 섬이면서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섬은 어디일까. 답은 ‘우리 땅 독도’이다.독도에 관한 한 남·북한이 따로 없다. 연일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한반도에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는 북한도 독도에 대해서는 언제나 한 목소리다.지난달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한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고유영토’라고 표기한 사실이 전해지자, 북한 외무성은 “새 세대에게 그릇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부당하면서 왜곡된 표기”라며 “영토 팽창
강릉
최동열
202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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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퇴’-동해안 어업인 수십년 황금어장-한·난류 교차, 어자원 보고-일본이 이름 지은 해산(海山) 유감-남·북한, 일본, 러시아 등 경제수역 갈등 첨예울릉도, 독도 동북방 공해상에 ‘대화퇴(大和堆)’라고 하는 어장이 있다. 바닷속에 해산(海山)이 솟아올라 만들어진 대륙붕으로, 동경 134도에서 136도 사이 공해상에 걸쳐 있어 면적이 남한 전체의 3분의 1인 3만600㎢에 달하는 거대한 어장이다. 그러나 공해상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 거리가 만만치 않다. 동해안 어업전진기지인 속초, 주문진, 묵호에서부터 무려 400여마일
강릉
최동열
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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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기적 사료- 봉평신라비의 발견1988년 4월15일, 매일신문은 고대 신라 비석 발견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독자들이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일간신문이 역사문화 기사를 1면 머리로 올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뛰어넘어 나라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 새로운 논거를 제공하거나 지금까지의 학설을 뒤바꿀 수 있는 정도의 기사가 1면 톱으로 대접받는 것이다.그날 매일신문이 보도한 신라 비석 발견 기사가 그러했다. ‘획기적 사료, 신라(新羅) 고비(古碑) 출토’라는 제목 그대로 비석은 신라
강릉
최동열
2023.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