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 성공회대 교수

▲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
▲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

오래 전, 제천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영월로 달리는 중에, 외지인을 반기는 큼직한 도로변 안내판이 아주 아름답고 기품 있어서, 차를 안전한 곳에 세워두고 한참이나 바라본 적 있었다.

안전한 곳에 서서 바라본 38번 국도변의 큼직한 안내판은, 마치 ‘동강국제사진제’에 출품한 작품 같았다.무엇보다 영월에 사는 주민들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 무슨 요란한 관광 포스터처럼 과장되게 웃는 게 아니라, 그저 엷은 미소로 ‘멀리 오느라 고생이 많습니다’하는 표정이었다.고향에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그랬는데, 얼마 전에 가보니 큼직한 안내판은 그대로인데 내용이 달라졌다.영월 사람들의 인자하고 넉넉한 표정 대신 이 일대의 관광자원들로 바뀌었다.이른바 명승고적 관광지 사진으로 바뀌었는데,아쉬웠다. 아니,조금은 속이 상했다.

유럽의 문화사에서 지방이나 시골은 언제나 풍요로운 자연,인정 넘치는 사람들,순박한 풍경 등으로 이상화 되어 왔다.바로크 전성기에 니콜라 푸생이 대표적으로 그렸던 이상향으로서의 ‘아르카디아’나 시민문화가 발달하던 로코코 전성기에 장 앙토닝 와토가 그린 ‘시테라’ 등은 모든 금지된 쾌락이 무한히 허락될 듯처럼 그려졌다.이러한 도상은 괴테의 자연 찬미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거쳐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등 낭만주의자들이 전개한 자연 숭고미로 이어졌다.그들은 그들이 상상한 ‘전원’을 순례했다.

한편, 19세기 낭만주의 여행문화도 여기서 파생한다.

거듭되는 피의 혁명,왕정복고,내전과 파업,그리고 다시 타오르는 혁명의 열기 속에서 시민계층이 역사의 한복판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국민국가 형성 과정의 피비린내 속에서 시민계층은 비현실적인 세계에의 추구(노발리스), 낯설고 먼 것에 대한 쓸쓸한 동경(슈베르트), 낭만적 연애와 그 비극적 파탄(플로베르) 등의 문화를 선호한다.증기선과 기차 노선을 따라 외곽의 소도시나 작은 마을의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여행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과연 그곳이 목가적이고 낭만적일까?탄광마을 출신인 소설가 D.H.로렌스는 “꽃 위에도 석탄 검댕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줄기차게 내려앉았는데,마치 최후의 심판일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검은 만나” 같다고 썼다.

본격 휴가철이다.나는 지금 관광 수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강원도 곳곳의 산과 바다가 실은 가난과 어둠의 땅이었다고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그걸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강조하건대,그것을 숨길 필요도 없고 미화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로렌스가 그랬듯이,고된 노동과 힘겨운 삶에도 불구하고 자식들 뒷바라지 다한 부모 세대를 제대로 기억하자는 것이다.오히려 강건하고 위엄있는 삶들 아니었던가.

그래서 덧붙인다.38번 국도변의 명승고적 안내판 대신 영월의 아버지,정선의 어머니,강원도의 자녀들.그 기품 있는 얼굴들로 다시 바꿔달라고.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