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를 향해 열려있는 일기, 쓰고 공유하는 연대의 신호
시대가 변하고 매체가 달라
지면서, 일기에 대한 정의와
역할도 달라지는 것 같다
그들은 가장 사적인 글을 통해
신호를 주고받으며
봉쇄와 격리의 시간을 건넜다
어쩌면 개개의 사람들이
하나의 신호였는지도 모르겠다

레트로 열풍이라고 한다.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물건 가운데에는 이런 것도 있다. 두터운 하드 커버에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 자물쇠 달린 일기장이 아직도 제법 잘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사실, 일기장에 달린 자물쇠는 작고 조악한 것이어서 완전한 비밀을 보장해 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자물쇠 다이어리는 다른 사람이 열어보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게 누군가에게 읽힐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일기를 쓰려는 것인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적인 기록을 남기려는 심리가 궁금해진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쉽게 찢길 수 있는 종이 재질의 케이스와 작고 조악한 수준의 열쇠는, 어쩌면 언젠가 누군가가 그 일기를 읽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멀거나 가까운 미래의 ‘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기는 분명 은밀하고 사적인 기록이지만, 이런 면에서 보자면 일기는 역설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대가 변하고 매체가 달라지면서, 일기에 대한 정의와 역할도 달라지는 것 같다. 여전히 종이 매체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일과를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공개를 전제로 한 사적 기록인 만큼 일기는 다른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 저녁 요리를 하고, 산책을 했다는 기록뿐인데도 사람들은 ‘좋아요’로 반응한다. ‘좋아요’와 ‘엄지척’은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의 다른 버전처럼 느껴진다.

어떤 일기들은 책으로 만들어져 출판되기도 한다. 국내 출판시장에도 최근 몇 권의 일기가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팡팡(方方)의 ‘우한일기’(문학동네, 2020)와 궈징(郭晶)의 ‘우리는 밤바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원더박스, 2020). 두 권의 일기는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지목된 우한(武漢)에 살던 두 사람의 기록이다.

팡팡과 궈징은 격리된 우한에 갇혀 있는 동안 소셜 미디어에 날마다 글을 올렸다. 몸은 격리되어 있었지만, 선을 타고 전해진 일기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일기를 읽었고, 답글을 달았다. 일기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제한된 환경에서 먹고, 마시고, 자는 이야기뿐이었다. 일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대개 ‘나’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일상의 이야기다 보니 드라마처럼 대단한 반전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크게 반응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일기에는 이상하게 공통점이 있었다. 봉쇄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고, 개인의 기록일 뿐인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선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기록이었다.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보니 이웃이 보낸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자신의 딸이 오늘 채소를 사러 나가는데, 가는 김에 내 것도 사서 우리 집 문 앞에 놓았으니 일어나면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채소를 가지고 들어오자마자 같은 단지에 사는 조카가 내게 전화해서 소시지와 발효 두부를 좀 가져다주겠다며 대문 앞에서 보자고 했다. 조카는 물건을 한 박스나 들고 왔다. 살펴보니 앞으로 한 달은 더 갇혀 있어도 다 못 먹을 양이었다. 재난 속에서 우리 모두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다.” (팡팡, 87쪽)

“어제 저녁에는 표고버섯 고기 볶음과 죽을 먹었다. 밤의 채팅에서는 각자의 좋은 일을 나눴다. 다들 요즘 같은 때는 좋은 소식이 너무 귀하다며 하나 둘 각자의 좋은 소식을 늘어놓은 것이다. 집에서 가족사진을 찍은 친구도 있고, 글을 썼다는 친구도 있는가 하면, 뒤로 미룬 지 한참 된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친구도 있었다.”

(궈징, 235쪽)

도시는 봉쇄되었고 사람들은 스스로 격리를 선택해야 했지만,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기를 바랐다. 팡팡은 일기를 공유했고, 궈징은 일기를 공유하는 동시에 밤마다 채팅을 했다. 그들의 사적인 글은 어떤 사설보다 많이 읽히고, 사람들이 공유하는 기록이 되었다. 사람들은 다만 일기를 쓰고 공유하며 서로 공감하고 감정적으로 연대했다. 팡팡의 일기를 읽고, 소설가 김훈은 이런 추천의 글을 썼다. “봉쇄된 대도시에서 시민들은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했”다고.

그들은 가장 사적인 글을 통해 신호를 주고받으며 봉쇄와 격리의 시간을 건넜다. 어쩌면 개개의 사람들이 하나의 신호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에게 신호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언제 끝날지 모를 격리의 시간을 건널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유강하 강원대 교수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