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풍자 줄타기하던 한 컷, 이제는 푸른 동심을 담아
수십년간 촌철살인 시사만화 연재
따뜻한 인간애 주조 이룬 세상사
‘공수래’·‘헹가래’ 장수만화 우뚝
정년퇴임 후 고향서 일러스트 몰두
동심으로 그린 춘천 관객 마음 다독

■공수래의 젊은 시절, 춘천

유환석은 만화를 그린다. 그의 만화는 어린이를 위한 만화가 아니다. 유환석의 그림은 네 컷의 시사만화와 한 컷의 카툰을 그리는 게 전부이다. 그는 매일 무엇인가를 그린다. 사람들은 그를 카투니스트 유환석, 아니면 일러스트레이터 유라고 부른다. 유환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그날그날에 일어난 사건이나 사회적인 이슈를 그림이란 언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시사만화는 세태를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몇 컷의 그림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 때론 웃음으로, 때론 부정과 비리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촌철살인으로, 때론 시대의 아픔으로, 때론 풍자와 은유의 방법으로, 뉴스는 독자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다. 그러므로 카툰은 뉴스를 작가의 시선으로 새로이 해석하고 문제의식을 독자에게 넌지시 제시한다. 독자는 그런 몇 컷의 만화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사회 현상을 올바르게 응시하는 눈을 가지게 된다.

유환석은 30여 년을 한결같이 시사만화를 그려왔다.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었고, 유환석이 창조한 캐릭터 ‘공수래’와 ‘헹가래’는 장수를 누려왔다. ‘공수래’는 1980년대부터 등장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강원일보에 입사한 유환석은 시사만화 카툰을 시작했다. 곧 그의 ‘공수래’는 강원도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시사만화는 새로운 눈뜸이었고 새로운 변화였다.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꿰뚫는 만평이었지만, 따뜻한 인간애가 주조를 이루었다. 부정(否定)보다는 긍정의 마인드가 유환석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카툰은 언제나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강원일보 시사만화는 7년 동안 2000여 회를 넘기면서 든든히 기반을 다졌다.

어느 날 유환석은 스포츠 조선의 창간 소식과 함께 카툰작가 사원을 모집한다는 사고를 보았다. 유환석은 연재했던 카툰과 이력서를 스포츠조선에 넣었다. 뜻밖에도 합격통지가 왔다. 그러자 유환석은 두려웠다. 자신의 그림이 과연 전국 독자들에게 씨알이 먹힐 수 있을까? 대체 내 실력으로 감당이나 되겠는가? 실력 없다고 쫓겨나서 빈둥빈둥 룸펜이 되는 건 아닐까? 망설이는 유환석에게 아내가 용기를 주었다. “당신은 카툰작가로 실력을 인정받아 합격한 게 아닌가. 백수가 되면 어떠랴. 이왕 놀 거면, 서울 가서 놀다 죽자.”
 

▲ 유환석 시사만화가의 ‘헹가레’
▲ 유환석 시사만화가의 ‘헹가레’

■헹가래 시대, 서울

1990년 3월. 스포츠신문에 스마트한 40대 중년의 시사만화 캐릭터가 새로이 등장했다. ‘헹가래’였다. 김성환의 ‘고바우’나 정운경의 ‘왈순아지매’, 이홍우의 ‘나대로선생’에 익숙해 있던 독자들은 새로운 캐릭터에 주목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헹가래’는 독자의 가슴에 희망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유환석의 카툰엔 일상의 고단함 속에서도 희망이 존재했다. 그것이 독자들에겐 큰 매력이었다. ‘헹가래’는 깔끔한 캐릭터로 어느덧 샐러리맨의 자화상이 되었다. 무려 17년. 지금도 ‘헹가래’는 인터넷신문과 각종 SNS 매체에 게재되고 있다. 5100여 회를 훌쩍 넘긴 ‘헹가래’는 장수 시사만화로 이 나라에 우뚝 섰다.

너무 바쁜 나날이었다. 주문이 폭주했다. 대기업 사보나 다른 신문의 카툰, 잡지의 일러스트 등 유환석의 일상은 밤낮으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었다. 유환석은 오래 몸담았던 스포츠조선을 정년퇴임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고향 춘천으로 돌아왔다. 춘천은 그를 따뜻이 맞이했다.
■다시 춘천, 고래와 어린 왕자

오래전 일이다. 강원중학교 미술 시간에 만화를 그리는 유환석을 허재구 선생님이 보셨다. “만화는 앞으로 시대를 이끌 거다. 넌 재능이 있어.” 작고한 선생님의 그 말씀이 아직도 유환석의 뇌리에 깊이 간직되어 있다. 선생님의 말씀은 적중했다. 서울로 간 유환석은 월간 ‘디자인’ 선정 ‘92년 베스트 일러스트5’에 선정되었다. 드디어 그는 일러스트 최고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춘천에 돌아온 유환석은 2018년엔 한국시사만화가협회 회장에 선출되어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유환석은 춘천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동심을 찾는 일이었다. 천진한 웃음과 부드러운 말씨, 늘 부끄러워하는 겸손함이 마음속에 배어있는 유환석이었다. 그림을 통한 동화는 그의 꿈이었다. 유환석은 호수의 도시 춘천에서 고래가 되었다. 그의 상상은 호수와 산과 골짜기를 넘어 바다로 갔다. 바다와의 경계를 허물고 고래는 호수를 바다로 만들었다. 하늘엔 고래가 떠다니는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아이들이 제일 먼저 그 고래를 타고 세상을 떠다녔다. 어린 왕자가 된 유환석은 아이들과 고래를 타고 다녔다. 유환석은 어린아이였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유환석의 일러스트 그림에서 순수한 자신의 동심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어른들에게도 새로운 변화였다.

자신의 집 건물 지하에 마련된 그의 작업실은 그다지 넓지 않다. 전기난로 하나와 작업대 하나, 사방 벽엔 그의 일러스트 그림이 선반에 잔뜩 쌓여 있거나 걸려 있다. 어쩌면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 같은, 그런 원초적인 생명이 깃든 곳일는지도 모른다. 유환석은 하루도 거름 없이 매일 그림을 그린다. 그럴 때마다 행복감이 해일처럼 밀려오곤 한다.

백발 성성한 꿈의 소년 유환석. 그가 그리는 모든 그림은 춘천을 소재로 한다. 춘천은 그의 테마이고, 궁극의 세계이다.

2021년 카툰 일러스트레이션전은 유환석의 진면목을 보여준 전시였다.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유환석의 동심에 감동했다. 특히 올해 2월에 펼쳐진 ‘라이프 가드닝’전은 예술인들이 만든 정원으로 소문이 났다. 뜻을 같이한 예술가들의 모임 ‘미술과 사람들’은 팬데믹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신선한 청량감을 주었다. 이 전시는 ‘미술과 사람들’의 동아리 작가 16명이 협업한 프로젝트였다. 집에 들인 정원을 테마로 유환석, 박병민, 최지관 작가는 ‘라인 드로잉’을, 벽면엔 허미순 작가의 섬유공예 작품이, 곳곳의 공간엔 김남주와 박명옥의 도예작품이 놓였다. 특히 거실엔 대나무와 폭포가 너울거리고, 깊은 공간 한 구석엔 식물멍이 자랐다. 식물멍은 식물을 보며 ‘멍 때리기’를 하는 문화란 의미를 지닌다. 코로나19가 생산한 반려식물 기르기의 한 형태이다. 시대의 현상을 즉시 반영하는 감성이 오늘날의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이제 예술도 대중의 소비문화 속의 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 선봉에 유환석 작가가 있다. 그는 춘천 예술가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창조와 소비, 창조와 여러 관계망, 창조와 시민, 창조와 동심이 복합적으로 기능하는 새로운 예술활동이 춘천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유환석은 언제나 봄

유환석은 유명인이지만 난체하지 않는다. 늘 겸손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다. 그런 유환석을 젊은 예술가들은 함께 하길 좋아한다. 본성의 착함은 긍정하는 삶의 본질이다. 이제 유환석의 동심을 춘천사람들은 자주 보게 될 것이다. 그가 표현하는 어린 왕자는 우리의 가슴에 늘 깃들어 있는 아름다운 꿈이다. <시인·춘천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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