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메질처럼
60년 근화동 지킨 강동대장간
박경환씨 손끝에서 ‘작품’ 탄생
3500도 화구서 쇠 녹여
천 번이 넘는 메질 끝 완성
많이 때릴수록 조직 치밀
‘정직한 일’ 대장장이 매료
전통 유지 속 새기술 연마 지속
아들 박성경씨 가업 잇기로
문화공간 조성 등 변화 시도

한 가지 일을 한 평생 꾸준하게 이어간다는 것은 수행에 가깝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그렇다. 편하고 빠른 길 마다하고 어렵고 고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반세기가 넘나드는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지금의 강원을 만든 역사이자 미래이기도 하다. 강원도 곳곳에 숨어있는 노포(老鋪) 얘기다. 강원도민일보는 창간 30주년을 맞아 지역의 노포(老鋪)를 다시 조명한다. 가게마다 켜켜이 쌓인 강원도민들의 애환을 되짚어보고 거기에서 지역의 가치를 모색한다. 노포에서 생산된 물품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세상에 소개된다. 강원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 또 다른 미래를 열어가는 작업이다.

▲ 강동대장간 박경환 대장장이가 작업을 하고 있다.
▲ 강동대장간 박경환 대장장이가 작업을 하고 있다.

천 번이 넘는 메질 끝에 낫 하나가 탄생한다. 호미, 낫, 괭이. 이 곳에서 파는 모든 농기구들은 똑같은 게 하나도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기구마다 조금 더 패이기도 하고 쇳물이 식은 흔적이 눈에 띄기도 한다. 모두 대장장이 박경환(55·사진)씨 손 끝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농기구들이 범람하는 지금 이 시대에도 박경환씨는 직접 쇠를 녹이고 메질을 해 모든 농기구를 만들어 낸다. 아버지가 시작한 대장간은 박경환씨를 거쳐 이제 아들이 이어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강동대장간은 이렇게 60여 년간 춘천 근화동을 지켜왔다.

▲ 강동대장간 박경환 대장장이.
▲ 강동대장간 박경환 대장장이.

강동대장간의 역사는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업이 주 산업이던 시절, 근화동 일대에도 대장간 대여섯 곳이 들어섰다. 때마침 인근에 번개시장이 조성됐고 근화동 일대 대장간은 서면을 비롯한 강북지역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농민들이 거쳐가는 곳이 됐다. 강동대장간도 그 무렵 자리를 잡았다. 박경환씨는 “아버지(고(故) 박수연씨·2011년 작고)가 워낙 키가 크시고 일도 제법 하시니까 그걸 눈여겨보시던 소양대장간 어르신이 ‘대장간 일을 배워보지 않겠나’라고 제안이 들어와서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 강동대장간 전경
▲ 강동대장간 전경

박경환 대표가 대장간 일을 본격적으로 맡은 것은 1996년부터다. 낚시업에 종사하던 박경환씨는 ‘괜히 옆에 붙어있다가’ 대장장이가 됐다. 박경환씨는 “아버지가 자꾸 불러내서 메질을 시키셨고 따라하다보니 어느새 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얼떨결에 시작한 일이었고,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인생을 바칠거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박경환씨는 대장장이라는 직업에 매료됐다. 무엇보다 ‘정직한 일’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박경환씨는 “내가 힘든 만큼 벌어들이고 남의 눈치를 안 본다는 매력이 있었다”고 했다.

▲ 강동대장간 벽에 옛날 칼들이 걸려 있다.
▲ 강동대장간 벽에 옛날 칼들이 걸려 있다.
▲ 세월이 묻어 있는 작업도구들
▲ 세월이 묻어 있는 작업도구들

이왕하는 거 제대로 하고 싶었다. 일이 좀 뜸한 겨울에는 가족여행 겸 전국 대장간 투어를 다녔다. 전국의 대장간을 훑고 다닌지 10여 년. 어느순간 투어가 의미없다고 느껴졌다. 전국 어디에가든 다 똑같은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가든, 전라도에 가든 충북과 충남을 가든 다 비슷비슷한 농기구를 만났다. 박경환씨는 “각 지방 특색에 따라 낫 모양이 다른데 어딜가나 똑같다는 것은 결국 자기가 만들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때부터는 강동대장간의 전통을 지키는 데 몰두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다짐을 지켜가는 일이 쉽지 만은 않다. 일의 능률을 위해 화구의 문을 열면 화구 안의 온도는 3500도를 넘나든다. 생명을 위협하는 온도에 맞서 쇠를 녹이고 쇠가 낫이 되고 호미가 될 때까지 끝없는 메질을 이어가야 한다. 박경환씨는 메질을 밀가루 반죽에 비유했다. 박씨는 “밀가루를 설렁설렁치대면 어떻게 돼요? 식감이 없죠. 많이 치댈수록 쫀득쫀득하잖아요. 밀도가 높아진다는 얘기거든요. 메질도 마찬가지예요. 망치로 많이 때릴수록 조직이 치밀해지죠”라고 했다. 낫 하나를 만들기 위해 ‘될 때까지’ 메질을 해야 하지만 그 고집은 ‘내가 만든 물건만 판다’는 자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 강동대장간에 걸려 있는 옛 호미들
▲ 강동대장간에 걸려 있는 옛 호미들

‘내 손으로 만들어서 판다’는 신념은 강동대장간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다. 아버지한테 배운대로, 아버지한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고 싶어 지금도 박경환씨는 망치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매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지만 몇 년 전에 쳤던 농기구를 보면 부끄러울 때가 많다.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전통은 지키면서도 박경환씨는 지금도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다. 10여 년 전에는 강원대 금속재료 석사과정을 1년 반 정도 청강 하기도 했다. 박경환씨는 “기술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며 “치는 방법도 계속 조금씩 변하고 있고 이를 적용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만들고 아버지가 지켜온 강동대장간은 이제 아들 박성경(25)씨로 이어진다. 올해 초부터 정식 직원이 됐지만 박성경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대장간일을 배워왔다. 성경씨가 고등학생 때, 아버지 박경환씨는 아들이 방학 수업 대신 대장간일을 배울 수 있도록 학교에 ‘대가 끊기지 않도록 부탁드린다’는 편지까지 썼다. 할아버지한테 배운 그대로를 실현하는 아버지가 존경스럽다는 성경씨. 제품에 대한 자부심 하나는 대단한 아버지가 자랑스럽단다.

▲ 강동대장간에서 제작한 호미
▲ 강동대장간에서 제작한 호미

가업을 잇겠다고 아들이 나섰지만,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편치는 않다. 수요가 점점 줄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박경환씨는 “‘정상적으로 가정을 꾸려 생활을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든다”며 “저까지는 어떻게 꾸려나갈 수 있는데 사라져가는 업종 중 하나라는 점이 참 안타깝다”고 했다. 그럼에도 ‘내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본업만큼은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박경환씨 심정이다.

강동대장간도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초등생들의 체험학습 공간이 되기도 하고 춘천시 슬로시티지정과 맞물려 새로운 문화공간의 가능성도 엿보고 있다. 강동대장간이 주민들의 소통의 공간,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의 공간, 아이들에게는 호기심의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박경환씨. ‘손을 놓으면 하늘나라로 가는 업’을 갖고 있는 만큼 아마도 30년 후에도 여든이 넘은 대장장이로 근화동 일대를 지키고 있지 않을까. 오세현 tpgus@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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