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붓한 골목길 사이 커다란 상상력 자라던 곳
옆으로 길게 누운 섬, 유리가루 뿌린듯 일렁이는 강의 잔물결
맹꽁이와 새들도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해진 풍경의 춘천 중도
링컨 미국 대통령 먼 미래 조국 자연 함부로 개발할 수 없게 해

▲ 이광택 작, ‘중도비가2’(2019)
▲ 이광택 작, ‘중도비가2’(2019)

19세기의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은 “본질적으로 미국 자체가 가장 위대한 시의 주제이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요세미티 공원이나 그랜드캐니언 같은 광대한 자연이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정체성 형성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현명한 생각이었다. 즉, 수천년간 다져진 유럽문화의 세련됨에 대해 신생국 미국이 어찌 상대가 되겠는가. 유럽이 결코 가지지 못했고 가질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광대무변한 대자연이었다. 휘트먼은 그러한 조국의 자연 속에서 모든 존재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높낮이 없이 눈앞에 펼쳐진 사물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그는 시를 통해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미국식 이상을 노래했다. 미국의 문화가 비로소 아류를 벗는 계기였다.

내가 알고 있기로 요세미티의 아름다운 자연을 국가 공원으로 만드는데 서명한 인물이 링컨 대통령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달린 내전(남북전쟁) 중에 내린 결단이었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바쁘고 바쁜 와중에도 링컨 대통령은 세심하게 먼 미래 조국의 자연을 그 누구도 개발할 수 없게 보존시킨 것이다. 해마다 요세미티 공원을 찾는 모든 미국 탐방객들은 그러한 결정을 내린 자신들의 대통령을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한다.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고향은 춘천시 삼천동(당시는 삼천리)이다.

어린 시절 저물녘, 형과 함께 집의 뒷산을 10여 분 걸어 올라가면 파노라마처럼 드넓은 호수와 산과 그사이에 깃든 마을 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선의 중심은 항상 옆으로 길게 누운 한 섬이었다. 조닥조닥 붙거나 뜨덤뜨덤 떨어진 섬 안 마을 집들은 조붓한 골목길도 어렴풋하게 보였는데,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도둑이 들 일이 없어서였을까, 울타리 없는 집들이 유난히 많았다. 노인네 한숨같이 어웅한 전등 불빛이 엷게 창에서 새어 나오고 귀가를 서두르는 이들의 숨소리까지 들릴 것 같으면 왠지 한가롭고 종교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어디 그것뿐이랴. 오늘과 같이 5월의 바람이라도 이분쉼표로 불면, 섬의 풍경은 밀감 빛 유릿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은 강물의 잔물결과 함께 연두색 여린 율동으로 가물가물 흔들렸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이런저런 핑곗거리로 뒷산을 오르는 횟수가 줄어갔다. 그 산 위로 가느소롬하게 각시 눈썹 같은 갈큇달이 떴다가는 지고, 구리쟁반같이 둥근 보름달이 청청한 하늘을 어머니 같은 얼굴로 지나 이울었다. 청절(淸絶)한 달빛은 언제나 그 영기(靈氣)로 마을과 산골짜기의 골수를 감싸듯 비추었고, 남모르게 스산한 눈물이 차 있는 사람들의 응달진 마음까지도 노란 털실의 따뜻함으로 어루만졌다. 섬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 후로도 오랜 시간동안 변하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아이는 마른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고운 꿈을 키웠고 상상력은 장마철의 버섯처럼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섬에서 살던 사람들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섬을 떠났다. 마을의 하늘을 정갈하게 비질하던 미루나무들은 베어지고 오랫동안 섬의 유산이었던 맹꽁이와 새들도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터주와 성주, 조왕, 업신은 물론 심지어 변소각시도 배겨내지 못했다. 화가가 된 아이의 마음속 풍경 역시 찢기고 해졌다. 그 섬의 이름은 바로 중도이다!

아, 나는 지금 잘 닫히지 않는 서랍을 앞에 둔 것처럼 마음이 무겁다. 몸속에 심지처럼 존재하고 있는 짙은 피로에 무력감만 느낀다. 한 집안의 장독대를 보면 그 집의 가격(家格)을 알 수 있다는데, 언제가 되어야 우리는 총명한 눈을 가진 링컨 같은 지도자를 만날 수 있을까. 갑자기 독일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가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나쁜 오케스트라는 없다. 그저 나쁜 지휘자가 있을 뿐이다.” 참된 리더는 국민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못난 리더는 오로지 자기 눈으로만 세상을 본다는 말이겠다.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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