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 회장이 계열사 부당 지원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등의 혐의다. 재계순위 10위였던 금호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풍수적 시각으로 살펴본다.

필자가 금호그룹의 선영을 찾기 시작한 것은 2009년 1월이었다. 화성 팔탄에 멋지게 조성된 박성용 회장의 묘소를 간산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금호의 신화를 만들어낸 박인천 창업회장의 선대(증조)묘소부터 소개한다.

창업회장 박인천 증조 묘소. 나주시 송죽리 소재.

영산강은 전남(全南)의 여러 시군을 경유하면서 서남방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

영산강의 길이가 긴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서남부의 중요한 지역을 아우르기 때문에 이른바 4대 강으로 분류된다. 영산강을 가장 넓게 품고 있는 지역이 나주(羅州)다.

박인천 증조 묘의 후고인 구수봉은 해발 150미터에 불과하지만 나주 벌판에 자리하다 보니 묘소로 향하는 길은 다소 가파른 느낌이다.

묘소의 후경과 맥로도.

전면에서 올려봐도 멋지지만, 묘소에서 내려다 보는 전경 또한 일품이다.

이 묘소가 금호그룹의 태동에 결정적 추동력을 주었다고 하는 풍객이 적지 않고, 묘소 전면의 노란 원으로 표시한 앞산을 훼손한 것이 금호가 어려움에 빠지게 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러나 맥로이론에 의하면 붉은 선의 맥로는 청룡방에서 진입하는 2회절 명당에 불과하니, 앞산이 묘소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 또한 이 정도의 풍수파워로는 중소기업의 창업도 어렵다. 맥로가 산의 상단부 청룡방에서 진입하므로, 그 하단에 있는 많은 묘소들은 도처가 흉지에 불과하다. 근동에 거주하시는 분은 확인해 보시라.

증조 묘소에서 내려와 송죽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1.5킬로 정도 가면 박인천의 조부모 묘소가 있다.

박인천 조부 묘소. 나주시 신포리 소재.

지목은 산(山)으로 되어 있으나 평지보다 약간 돋아있을 뿐 산이란 느낌은 들지 않는다.

박인천 조모 묘소. 조부모 묘소는 합봉이나 쌍분을 하지않고, 각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모셨다.

위성지도에 표시한 맥로도.

묘역기준 동북방면의 무등산 일지맥에서 떨어진 맥로가 서남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묘역 직전에서 3갈래로 분지하여 1번 조부, 2번 조모 3번 조모 묘소에 정확히 혈을 맺었다.

조부 묘소는 13회절, 조모 묘소는 20회절과 10회절 명당이니 중견기업에서 대기업까지도 추동할 수 있는 풍수역량이다.

금호의 창립과 발전은 조부모 묘소의 풍수파워 덕분이다.

@ 증조 묘소는 구수봉의 7부 능선에 우뚝자리하니 기(氣)가 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상은 평지에 자리한 조부모 묘소의 풍수파워가 더 강하고 좋은 곳이다.

산의 외형만 보고 기(氣)의 강약을 판단하면 오류가 발생하기 쉽다.

박인천 부모 묘소. 나주시 문동리 소재.

박회장의 조부모 묘소에서 북쪽으로 영산강을 넘어 시오리쯤 되는 곳에 자리한다.

재실 뒷켠에 깔끔하게 정돈된 묘소는 보기에는 좋지만, 혈처의 역량은 소지소혈에 불과하니 소기업의 추동도 어렵다.

금호그룹 창업자 박인천(1901~1984년)과 부인 이순정(1909~2010년) 묘소. 광주광역시 운암동 소재. 박인천이 1973년에 설립한 금호고등학교의 백호방 야산에 자리한다.

박인천은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19세에 요즘 7급에 해당하는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일제 강점기에 순사를 한 적도 있다. 그는 해방 전에는 여러 가지 사업을 했으나 모두 실패한다. 해방 후인 1946년에 2대의 택시로 시작한 사업이 대박이 나자, 이어서 1948년에는 2개의 노선(광주~장성, 광주~담양)을 운행하는 버스 운수업으로 확대한다. 1971년,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광주고속”은 전국을 누비게 되는데, 여기에는 호남인들의 광주고속을 애용해 준 것도 한 몫 작용하였다. 그는 이어서 운수·제사(製絲)·타이어 제조·합성고무 등의 사업을 통해서 금호아시아나의 전신인 금호실업을 설립했다.

박인천 부부 묘소의 후경. 묘소는 길흉경계선 밖에 자리하니 명당이 될 수 없는 곳이다. 오른 쪽의 노란색 원형으로 표시한 곳이 혈이 맺는 곳이다.

위성지도의 표시처럼 길흉경계선 밖에 모신 박인천 부부 묘소는 자리가 될 수 없는 곳이다.

박성용(1932~2005년)과 박마가렛(2013년 별세) 부부 묘소. 화성시 기천리 소재.

창업자 박인천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받은 사람이 장남 박성용이다. 그는 서울대학 재학 중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예일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1968년, 대통령 박정희는 해외 인재들을 귀국시키는 조치를 취하는데, 박성용도 이 때 귀국하여 청와대 비서실에 근무한다. 이후 서강대 교수로 돌아가서 남덕우 등 그 유명한 ‘서강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1974년에는 금호에 합류한 지주회사인 금호실업을 만들었고, 적자이던 금호건설을 흑자로 전환시키는 등 금호가 명실상부한 대그룹의 면모를 갖추도록 했다. 88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대기업들의 각축 속에서 제2민항 사업권을 따내어 아시아나 항공을 탄생시켰다.

장남인 박성용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형제공동경영 합의서”를 만든다. “회장직은 65세까지, 최장 10년을 넘지 않는다. 형제는 그룹지분을 동일하게 보유한다”가 그 주요 내용이었다. 그리고 합의서 내용대로 박성용은 1996년 회장직을 동생 박정구에게 넘겨준다.

박정구(1937~2002년) 묘소. 세상은 먼저 떠났으나 묘소는 형님 아래에 모셨다.

박정구는 연세대를 졸업하자 바로 금호에 참여하여 현장형 경영자로서 수완을 키웠다. 회사의 경영권을 물려받자 중국에 적극 진출하는 등 금호그룹 성장에 저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2002년, 회장이 된지 7년만에 지병인 폐암으로 별세한다. 그러자 금호는 3남 박삼구가 그룹 회장직을 승계한다.

금호의 기천리 선영. 위는 박성용, 아래는 박정구 묘소.

위 묘소를 소점한 풍수가의 말을 인용한다. “태조산은 칠현산이고, 중조산은 광교산이다. 칠보산이 소조산이고 태행산이 주산이다. (…) 혈장으로 입수된 내룡은 요도가 발달해 생기가 발랄하고 지맥은 후덕 방정하여 부귀룡에 속한다. (…) 입수가 형기적으로 부귀하고 이기적으로 생왕의 기운을 품었으니 안장하면 대발(大發)할 터”라고 했다. 그러나 2005 박성용 회장 사후에 벌어진 일들을 위의 감평과는 달랐다.

2002년, 박삼구가 그룹회장직을 인수했을 때 금호는 재계서열 10위권에 속했다.

금호는 무리하게 대우건설(2006년)과 대한통운(2008년)의 인수를 통하여 재계서열 7위까지 올랐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외환위기가 밀려오자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대우건설을 되팔았고, 2010년에는 워크아웃을 체결하면서 우량기업들을 줄줄이 매각한다. 2019년에는 금호의 상징과도 같은 아시아나 항공의 매각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박삼구의 과욕이 금호그룹의 몰락을 초래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나, 필자의 풍수적 소견도 덧붙인다.

1.대기업의 창업은 대기업을 추동할 풍수파워를 지닌 선영이 있어야한다.

2.대기업이 지속발전 하려면 대대(代代) 또는 격대(隔代)로 대기업을 추동할 수 있는 선영이 다시 있어야한다.

3.금호는 창업회장 조부모 묘소의 풍수파워로 발복하였지만, 그 이후에는 대기업을 지속 발전시킬 대명당이 없다.

4.게다가 창업회장 박인천(1984년 졸)을 흉지에 모셨고, 배위인 이여사(2010년 졸)를 합장으로 모셨으니 흉의 기운이 배가(倍加)되었다.

5. 박성용, 박정구 묘소도 길흉선 밖인 면배의 배(背)에 모셨다.(하단의 위성지도 참고)

6. 즉, 금호는 창업회장과 박성용·박정구 묘소, 3기 5분을 흉지에 모신 셈이다. 풍수적으로는 쇠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 동기감응의 묘 바람은 직계 자손뿐만 아니라 형제와 숙질(叔姪)간에도 작동한다.

위성지도에 표시한 기천리 묘역.

아쉬운 것은 바로 근처에 창업회장 조부모 묘소와 대등한 대명당을 놓친 점이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