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영훈 인성병원 외과전문의
▲ 조영훈 인성병원 외과전문의

흔히들 입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항문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항문은 소화기관의 맨 끝에 있고 그 부끄러운 위치 때문에 그동안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생활양식이 개선되면서 항문 위생, 항문 질환 예방과 관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항문은 겉모양과는 달리 그 구조와 기능이 복잡하고 섬세하여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되는 기관이다.

이런 항문에 생기는 질환 중 하나인 치루는 대변이 모이는 저장 창고인 직장을 밖으로 통하게 해주는 곳인 항문 이외의 또 다른 구멍이 생기는 병이다. 전체 항문질환에서 치핵이 약 70~80%, 치열이 10~20% 정도 되는 것에 비해 치루는 약 10% 수준임에도 상당히 치명적이다. 치루는 치료하기도 쉽지 않고, 한 번 걸리면 재발도 잘 되며, 장기간 지속되면 치루암으로 진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치루는 처음에는 주로 항문 주위 농양 형태로 나타난다. 고름이 생기고, 점점 깊숙하게 곪아 들어가면서 항문 안쪽이나 바깥쪽 피부까지 가르다란 길을 낸다. 이처럼 항문 이외의 길이 나는 병이어서 우리말로 ‘항문 샛길’이라고도 불린다. 손으로 만져 보면 마치 전깃줄을 심어놓은 것처럼 그 줄기를 느낄 수 있다.

치루의 증상은 항문 주변이 쑤시고 아프면서 항문 주위가 빨갛게 붓고 농양이 생기고 구멍이 뚫린다. 농양이 생기면 고름이나 진물이 속옷에 묻고, 농양이 터져 구멍이 뚫리면 고름이 구멍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한다. 간혹 항문 바깥쪽이 아닌 골반 쪽으로 퍼져 들어가 아주 많은 농양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때는 항문 밖에서는 붉은 발적이나 구멍을 볼 수 없어 치루인 것을 알아차리기가 힘들 때도 있다. 이 경우에는 항문 깊은 곳이 아프면서 감기 몸살에 걸린 것처럼 열이 나고 쑤시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항문샘에 생기는 염증은 치루의 주 원인이다. 항문에는 대변이 나올 때 잘 나올 수 있도록 미끈미끈한 점액을 분비하는 항문샘이 있다. 항문샘은 움푹 파여 있기 때문에 대장 내에 있는 세균이나 대변이 흘러 들어가기 쉽다. 오랫동안 세균이나 대변이 항문샘에 쌓이면 염증이 생긴다. 염증이 지속되면 항문샘이 점차 커지고 내부에 고름이 차기 시작한다. 고름이 가득 차면 압력에 의해 가장 약한 부위로 고름이 터져 나가게 된다. 치루는 어느 위치에 생겼는지에 따라 크게 괄약근간형, 괄약근 관통형, 괄약근 상형, 괄약근 외형 네 가지로 구분한다. 치루가 만든 구멍은 하나인 경우도 있지만 처음부터 두 개 이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이처럼 두 개 이상의 구멍이 난 치루를 ‘다발성 치루’라고 하며 치료하기가 더 어렵다.

항문 주위 농양은 대부분 치루로 진행되기 때문에 동일한 질환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농양의 약 5~10% 정도에서는 단순히 농양을 절개해 고름을 빼내면 치루 수술을 하지 않고도 치유될 수 있다.

또한 치루 외에도 한선 농양, 피하낭종 등 항문 주위에 농양을 유발시킬 수 있는 질환이 있으니 농양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치핵과 치열은 보존적인 치료나 약물 치료로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으나 치루는 수술만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다. 이미 복잡치루로 진행된 상태에서는 치료과정도 어려워 엉덩이에 종기가 난 정도로 가벼워 보이는 증상이 있을 때라도 외과를 방문하여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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