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선 소설가
▲ 김희선 소설가

‘한 도시 한 책 읽기’라는 운동이 있습니다. 1998년 시애틀 공공도서관 사서였던 낸시 펄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미국 전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언제였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어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지요. ‘한 도시 한 책 읽기’는 몇 가지 장점을 지닌다고 합니다. 지역사회가 한 권의 책을 선정하여 모두 읽고 토론함으로써 독서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화합하여 지역사회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과연 한 도시는 한 권의 책을 반드시 다 함께 읽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 도시의 모든 주민이 같은 책을 읽는다는 발상은 어딘지 모르게 기묘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고 화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같은 책을 읽고 얻은 같은 생각이 아니라,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자세니까요. 누구나 서로 다른 생각을 하지만 동시에 각자를 존중하며 이해하는 사회는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같은 것을 생각해야만 서로를 이해하는 사회는, 그로테스크할 뿐입니다.

‘한 도시 한 책 읽기’를 위해 선정된 책의 면면 또한 기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시민들 위에 존재하는 어떤 비밀 위원회 같은 것이 있어서, 거기 속한 위원들이 (아마도 그들은 가장 올바르고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도덕적인 책을 고르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쳐 있겠지요) 엄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고른 것인가, 싶으니까요. 물론, ‘한 도시 한 책 읽기’를 위해 선정된 책 자체를 비판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제가 궁금한 것은, 나이, 지적 수준, 관심사, 취향 모든 게 다른 이들에게 읽힐 만한 단 한 권의 책을 고르는 기준일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한 도시 한 책 읽기’를 위해 한 권의 책을 고른다는 발상은, 독서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행위란 망망대해를 향한 항해와 같으며, 스스로 노를 저어 그 바다를 건너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서 만나는 것들 또한 지극히 개인적이며 자유로워야 합니다. 때론 이상한 책을 만날 수도 있고 때론 지극히 모범적인 책을 만나기도 하며, 그런 다채로운 독서 경험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성장해나가는 거지요. 하지만 ‘한 도시 한 책 읽기’로 권장되는 독서는, 그런 책읽기의 본질에서 한참 떨어져 있습니다.

인지 심리학자인 키스 E. 스타노비치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우리편 편향’이라는 인지적 편향에 빠져들기 쉽다고 합니다. 뇌는 진화의 과정에서 기본적 계산 비용이 적게 드는 정보 처리 기제를 디폴트로 삼으려는 경향을 갖게 됐고, 그 결과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이들과 무리를 짓고자 하는 본능을 지니게 된 거죠. 현대의 미디어나 SNS 알고리즘은, 우리를 더더욱 심하게 인지적 편향으로 몰아갑니다. 관심사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만을 연결해줌으로써,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해주니까요. 이렇게 ‘우리편 편향’으로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뇌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되며, 인지적 편향은 가속화됩니다. 스타노비치는, ‘우리편 편향’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재틀짓기(reframing)’를 제시했는데, 이는 억지로라도 자신 및 자신이 속한 집단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일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종다양한 독서는, 이러한 재틀짓기에 가장 적합한 길이기도 하지요.

만약 한 도시가 한 권의 책을 읽는 대신 수백만 권의 책을 읽는다면,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한 도시 한 책 읽기’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모두가 수백만 가지의 다양한 관점을 가진 독서를 하도록 권장하는 건 어떨까요? 수십만의 시민들이 수십만 개의 꿈을 꾸며 동시에 타인의 꿈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세상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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