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현아 편집부 차장
▲ 노현아 편집부 차장
드라마 ‘더 글로리’ 이야기다. 드라마를 다 본 다음 마음속에 남은 이는 처절하게 추락한 연진이도, 끝내 복수를 이룬 동은이도 아니었다. 내게 끝내 남은 자의 얼굴은 가해자들에게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메마른 얼굴을 하고 있던 경란이었다. 피해자들의 시원한 복수의 칼춤도, 가해자들의 추락의 쾌감도 드라마가 끝난 순간 금세 휘발됐지만 내내 무력해 보이던 경란의 표정만이 마음속에 질문처럼 남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경야독 끝에 대학에 가고 교사가 되어 복수를 성공한(틈틈이 바둑도 배워야 하는) 동은이는 주변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겠지만 우리는 이미 수많은 경란을 알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 김은숙의 인터뷰를 보면 모든 피해자가 동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경란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과거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피해자들도 있고 그게 더 슬플 것 같았다고 말한다. 경란에게도 나처럼 매월 꼬박꼬박 내야 하는 카드값이 있었겠지만, 학교폭력을 당했던 경란이 성인이 된 현재까지 가해자들의 밑에서 부역하며 지내는 모습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가정폭력이건 학교폭력이건 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원인을 자신에게 찾으며 폭력을 감내하며 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외부의 폭력은 제어할 수 없지만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야”라며 자책하고 고통의 감각을 잃어간다고 한다. 남편에게 맞고 사는 부인이 “내가 맞을 만해서 맞은 거야”라며 사는 경우가 그것이다. 동은이는 자퇴하고 복수를 꿈꿀 수 있었지만, 학교를 졸업했음에도 경란은 가해자들과 사장과 직원이라는 관계로 제2의 체육관인 편집숍 ‘시에스타’로 자리를 옮겨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문득 이 드라마의 제목이 왜 더 글로리인가를 생각한다.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라는 뜻을 가진 영광의 반대말이 ‘수치’라면 드라마가 말하는 수치란 뭘까. 동은이 그 옛날 자신을 외면한 친구 경란의 뒤늦은 사과에 되돌려주는 말은 “나는 더 이상 그 복도 위에 서 있지 않아 그러니 너도 그 체육관에 서 있지 마”란 말이었다. 누군가는 뜨거운 고데기로 열체크를 당하던 체육관을 자기 발로 벗어날 수 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체육관에서 벗어나지 못할지 모른다. 어쩌면 어린 동은이가 체육관에서 “내 꿈은 너야”라고 복수를 선언한 순간 그때 문틈으로 들어온 한 줄기 빛처럼 가해자들에게 짓밟힌 영광을 이미 되찾지 않았을까.

우리는 교도소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날씨 뉴스를 전하는 가해자 연진이의 결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이 세상 모든 경란이들의 결말이다. 부디 세상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경란이들이 체육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광을 찾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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