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출신 허은실 시인 춘천 낭독회
봉의고 졸업, 20년여만 방문
두 번째 시집 ‘회복기’ 소개
90년대 고교 시절 기억 풀기도
“고향에 문학적 대상 살아있어
타인 간 관계는 평생의 화두”

▲ 허은실 시인이 최근 춘천 책방 바라타리아에서 낭독회를 갖고 지역 독자들과 만났다.
▲ 허은실 시인이 최근 춘천 책방 바라타리아에서 낭독회를 갖고 지역 독자들과 만났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눈빛에 책임이 있어요//거친 여울 저무는 기슭에서/서로의 눈에 스민 계절을 헤아리며/표정이 닮아갈 날들(시 ‘반려’ 중)”

허은실 시인이 20여년 만에 문학의 씨앗을 키웠던 장소인 춘천을 찾았다. 허 시인은 고향 홍천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에서 6년째 살고 있다. 시인은 최근 춘천 책방 바라타리아에서 ‘회복하는 사람들을 위한 한여름 낭독회’를 가졌다.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춘천에서 낭독회를 갖고 싶다는 소망을 이룬 날이었다. 오래 전 친구를 만난 듯 독자들과 나눈 대화의 농도는 다채로웠다. 평생의 화두로 밝힌 ‘타인’과의 관계는 조금은 더 가까워졌을까.

“무릎이 꺾여본 자만이 바닥을 알 수 있다고/(중략)/신이 인간의 무릎에/두 개의 반달을 숨겨둔 이유//엎드려 서로의 죄를 닦아내라고/그것은 대지에 무릎을 꿇고/정원을 가꾸는 일”

허은실 시인은 직접 고른 시 ‘무릎’을 낭독하며 작품에 담긴 사연을 풀어냈다. 낭독 뒤 아이유가 부른 동명의 곡을 들려주기도 했다.

지난해 출간된 두 번째 시집 ‘회복기’에는 기후위기와 제주 4·3 사건 등을 다룬 작품이 많다. 시인은 “우리는 모두 회복해야 하는 어떤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시작으로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그려냈다.

“당장 여름 감기로부터 회복돼야 하고 어제 먹은 술로부터도 회복돼야 한다. 부부 또는 친구 관계, 아니면 내면의 트라우마도 있을 것이다. 그것들로부터 끊임없이 나를 치유하고 회복해야 한다. 시야를 넓혀보면 우리 사회에는 회복해야 될 것이 너무 많다. 제주 4·3도 있고 기후위기도 있을 것이다. 시기의 문제일 뿐, 환경이나 문명이 회복 불능의 상태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다시 이야기’ 없이는 진정 회복은 불가능하다.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함으로써 상처가 치유된다. 시를 쓰면서 나도 모르게 스스로의 상처를 바라본다. ‘이것 때문에 내가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 됐구나’라는 자각이다.”

시인에게 1990년대 초 춘천의 기억은 강렬하다. 과수원이 있던 봉의고에서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다. 육림극장과 피카디리, 지금은 없어진 청구서적이 약속의 장소였다. 윤동주 시를 필사하기도 했고 오글거리는 말을 찾기를 좋아했다. ‘짚신’이라는 독서토론 고교연합동아리에도 있었다. 시인은 “행사에 앞서 모교를 다녀왔는데 예전보다 작게 느껴졌다”며 “많은 것이 변했지만 하숙집 골목은 그대로였다”고 했다.

“뒷문으로 박쥐들이 날아갔다/부엌에 선 순간,/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이 있었다/언 배추를 중얼중얼 씹어먹고 있었다/나를 보고 여자가 씨익 웃는다/죽어서도 얼마나 머리가 아프겠니/무덤을 여니까 나무뿌리들이/그 여자 머리뼈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대/엄마는 혀를 찼다”

시 ‘개를 끌고 다니는 여자’의 일부다. 옛 동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정신이상자에 대한 내용이다. 시인의 고향은 홍천의 오지로 꼽히는 내촌면 광암리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중학교를 오고 가는 버스는 하루에 두 대 정도밖에 없었다.

허 시인은 “이제 고향집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꿈에 나온다”며 “이 시를 쓰면서 그 작은 산골에 내 문학의 씨앗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름도 모르는 ‘미친년’이라고 불리는 타자화된 어떤 존재가 내 시의 출발인 것 같았다. 기억 속 고향은 나의 문학적 대상이 살아있는 장소”라고 했다.

허 시인은 2010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첫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와 산문집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등을 펴냈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작가로도 활동했으며 제8회 김구용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표제시 ‘회복기’는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썼다고 한다. 낭독이 끝나자, 시인이 직접 부른 ‘제비꽃’의 허밍이 흘러나왔다. 김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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