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항쟁 꼬리표 탓 차별대우” 기소된 20여명 아직도 죄인
전효덕 군법회의 징역 3년 집유 5년
2011년 별세 무죄판결 아내 최씨 몫
“직장서 주동자 낙인 결국 터전 떠나
하늘에 있는 남편 올바른 판결 받길”
노금옥 군법회의 징역 2년 집유 3년
성적학대·고문 폭로 여성 생존자 유일
사북광업소 근무 남편 윤씨 함께 연행
“과거 적극적 무죄주장,그 과정 고단
이제는 포기하고 그때 일 잊고 싶어”

▲ 사북항쟁 당시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했던 노금옥씨와 윤원철씨 부부
▲ 사북항쟁 당시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했던 노금옥씨와 윤원철씨 부부

사북항쟁 피해자 고(故) 박노연, 오항규, 진복규, 양규용 씨는 지난 13일 재심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가족과 사북항쟁동지회 회원들은 기쁨과 억울함의 눈물을 흘리고 판결을 축하하며 박수를 쳤다. 서로에게 감사함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사북항쟁으로 기소됐던 20여 명의 피해자와 아직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까지 무죄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은 상황이다.

1980년 당시 정선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새마을사택에 거주하고 있던 노금옥(80)씨는 사북항쟁 과정 중 발생했던 노조지부장 부인 폭행과 시위 주동 혐의도 정선경찰서에 연행돼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사북광업소에 일하고 있던 광부이자 노금옥씨의 남편인 윤원철씨 역시 사북항쟁 관련자로 연행돼 고문을 받았으나 부인인 노금옥씨와 같이 기소되지는 않고 풀려났다. 당시 연행되던 상황을 설명하며 노금옥씨는 “새벽에 누가 찾아와 문을 열었더니 어떤 사람은 손으로 입을 막고 또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목을 졸랐다”며 “그렇게 이 곳, 저 곳을 몽둥이와 군화로 맞으며 버스에 타 내려 보니 정선경찰서였다”고 말했다.

▲ 2007년 사북을 방문한 전효덕(사진 왼쪽)씨가 이원갑 씨와 함께 1980년 사북사건 현장을 둘러보며 증언하고 있다.
▲ 2007년 사북을 방문한 전효덕(사진 왼쪽)씨가 이원갑 씨와 함께 1980년 사북사건 현장을 둘러보며 증언하고 있다.

노금옥씨는 정선경찰서가 신속한 수사 진행을 위해 많은 사람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도록 급조해 놓은 공간 같았다고 증언했다. 노 씨는 “통로는 하나인데 서로 보이지만 않게 합판으로 막아놨다”며 “임시로 막아놔서 벽을 때리면 서로 울려 정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경찰서에 도착한 노금옥씨는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거나 무릎 뒤에 각목을 대고 무릎을 밟히는 등 고문과 더불어 성적 학대도 당했다. 결국 노 씨는 이후 군법회의 이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나올 수 있었다.

현재 노 씨는 현재 합동수사단의 성적 학대와 고문 폭로한 4명의 여성 폭로자(전선자, 김분연, 이명득, 노금옥) 중 유일한 생존자다. 당시 받았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다는 노금옥씨는 이번 무죄판결 결과에 자신도 무죄를 받을 수 있을까 기대도 되지만 그보다 이제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노 씨는 “이번에 재심에서 무죄 받은 사람들 외에도 이미 많은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났고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예전에 적극적으로 무죄를 요구했음에도 이뤄지지 않았고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포기하고 그때 일을 잊어버리고 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말했다.

1974년부터 약 8년간 동원탄좌에서 일했던 전효덕씨도 당시 사북항쟁 관련자로 끌려가 모진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심지어 고문 과정에서 ‘이북에 몇 번 다녀왔느냐’, ‘이북에 가는 방법을 아느냐’ 등 간첩이라는 허위 진술을 하라는 협박도 받았다. 그렇게 군법회의를 통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은 뒤 풀려날 수 있었다. 이때 당한 고문으로 허리를 크게 다쳐 평생 고생하던 전효덕씨는 지난 2011년 세상을 떠났다. 전효덕씨의 부인인 최옥자(72)씨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남편이 혹시나 내가 마음 아파할까 직접 어떤 일을 당했는지 얘기한 적은 없지만 당시 속옷 차림으로 끌려간 남편을 위해 옷을 챙겨갔던 정선경찰서에서 조사 받고 나오던 주민들을 통해 대강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며 “그때 허리를 크게 다쳐 집에 와서도 좋다는 약을 다 먹었지만 제대로 일할 수 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 지난해 원주 자택에서 만난 노금옥씨와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  사진제공=정선지역사회연구소
▲ 지난해 원주 자택에서 만난 노금옥씨와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 사진제공=정선지역사회연구소

전 씨는 사북항쟁 주동자라는 꼬리표 탓에 직장에서 차별대우를 받았고 결국 정선을 떠나 횡성을 거쳐 서울에 정착하게 됐다. 최옥자씨는 “남편이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식당에 나가 설거지라도 해야 애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며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도 한 푼, 두 푼 모아 식당을 차리게 됐다”고 토로했다. 최옥자씨와 전효덕씨가 운영하던 식당은 사북항쟁동지회의 아지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최 씨는 “이원갑 회장님을 비롯해 동지회 사람들이 상경 집회를 오거나 대학교수, 관계자, 변호사 등 면담을 하고 나면 꼭 남편이 사람들 식사도 대접하고 잠자리도 마련해주자고 해서 우리 식당에 많이 왔었다”며 “식당에 작은 방에서 식사도 하고 서로 억울함도 토로하면서 어쩔 때는 20명도 넘는 사람이 우리 식당에서 자던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신과 동료들의 무죄 판결을 위해 노력하던 전효덕씨가 2011년 세상을 떠난 이후 전 씨의 무죄판결은 부인인 최 씨의 몫이 됐다.

최옥자씨는 이번 4명의 무죄판결을 보고 남편도 이제는 무죄판결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다고 했다. 최 씨는 “남편이 죽은 뒤에 나도 먹고 살기 바쁘지만 그래도 매년 정선에서 열리는 사북항쟁 기념식에 가고 변호사님도 만나 재심도 얘기하며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며 “이제는 하늘에 있는 남편이 억울함을 풀 수 있도록 무죄 판결이 내려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정호 kimjho@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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