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덕 문화플랫폼 봄아 대표
▲ 이종덕 문화플랫폼 봄아 대표

‘나랏말쌍미 듕국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마디 아니할씨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할베이셔도 마참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몯할노미 하니라…(후략)’ 그 유명한 세종의 한글 만들기 프로젝트 서문이다.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뜻을 전할 방법이 없음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쉽게 익혀 편하게 사용하길 바란다는 뜻이다.

세종은 한글을 만들어 시험 삼아 아들 수양대군에게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석보상절’을 지어 바치게 하는데 그때 신미대사가 동참하게 된다.

세종은 결과물을 보고 흡족해하며 스스로 글을 지으니 ‘월인천강지곡’이다. 이후 아버지의 유훈을 받든 세조는 1457년(세조 2년) 신미대사를 수장으로 하는 간경도감을 설치, 집현전 학자들까지 참여하여 불교 경전을 통한 한글 보급에 나섰다.

이 대역사에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동참하셨다. 평생을 생육신으로 사셨지만, 한글 보급에는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참여한 것이다.

신미대사는 이후 오대산 상원사 중창에 나서는데 국보 제292호로 지정된 상원사중창권선문(1464년, 세조 10년)에는 신미스님의 수결과 세조, 왕세자, 세자빈 등의 서명과 도장이 선명하다. 세조는 신미대사를 받드는 의미에서 ‘중창권선문’ 어첩과 함께 철 5만 5000근, 쌀 500석, 면포와 정포 각 500필 등을 내렸다고 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세조 10년, 1464년)

이듬해 또다시 철과 쌀, 면포 등을 하사하였고 완공 후인 1467년에는 강릉부 산산 제언(제방)을 하사한다. 그리고 율곡 이이 선생은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한글로 번역한 ‘사서언해’를 집필하시게 된다. 한글이 만들어진 후 실로 130년 만의 일이다.

송강 정철 선생의 ‘관동별곡’은 수능시험 단골 메뉴로 오늘날까지 두루 전하고 있다. 그 중 일부인 ‘羽蓋芝輪(우개지륜)이 鏡浦(경포)로 나려가니 十里(십리) 氷紈(빙환)을 다리고 고텨 다려 長松(댱숑) 울흔 소개 슬카장 펴디시니 믈결도 자도 잘샤 모래랄 혜리로다’는 당대 최고의 가사문학으로 손꼽히며 선비문학으로 한글이 격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교산 허균 선생은 경포호 반대편에 만권의 책으로 최초의 사설 도서관인 호서장서각을 만들었으며, 그가 남긴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세종의 훈민정음에 새겨진 애민정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300여년 후에 백마 타고 온 초인들처럼 한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주시경 선생이 한글을 연구하는 운동을 시작하셨고, 이후 조선어학회에서 지역마다 다른 말을 모으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 ‘말모이’였다.

이때 일제 탄압으로 28명의 학자가 갇히게 되는데 이윤제, 한징 선생 등은 모진 고문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광복 이후 다시 12년의 노력 끝에 1957년 ‘큰사전’을 펴내게 된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한글을 지켜냈기에 우리는 지금 한류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1972년 강릉에서 어촌 심언광(沈彦光)의 수택본으로 발견된 ‘동국정운’(세종이 편찬토록 한 훈민정음 사용법)은 오래된 한글 사랑의 숨결일 것이다.

시대를 넘나드는 이 방대한 기록들이 경포호숫가에 남겨진 것은 세종이 남기신 ‘월인천강지곡’ 속 천개의 달처럼, 우리 역사에 자애로운 달빛이 되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빛나는 달로 경포대가 새겨진 까닭이 아닐까?

경포습지 가시연꽃의 부활처럼, 석가모니와 가섭존자의 염화미소(拈華微笑)처럼 올해 한가위에는 경포에 천개의 달을 띄우는 축제가 열린다. 경포호는 그리하여 한글의 고향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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