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영 글씨당 대표
▲ 김소영 글씨당 대표

글씨 공연을 하다 보면 정말 갖가지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비가 오는 야외이거나 무대가 없다거나 관객이 없는 상태에서 공연. 이보다 최악은 없을 거야 같은 생각이 드는 흙바닥부터 황송한 연출과 화려한 조명의 무대까지 다양한 곳에서 수많은 작품을 공연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먹물과 빗물을 함께 범벅해 완성하고 바람이 거세게 불면 바람을 맞으며 바람의 방향대로 먹을 튀겨가며 마치기도 했다. 먹물이 쏟아지고 물이 엎어질지언정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도 마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 내게 소중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붓 공연을 하는 것은 처량하지만 한편으론 극적이기도 했다.

행사라는 것은 주최하고 여는 이가 있고 거기에 참여해서 펼치는 이가 있다. 보통 여는 이가 ‘갑’이고 참여자가 ‘을’이다. 그것은 계약 관계이며 금전이 오가는 일이라 서류상 표현에도 등장하는 지칭이며 으레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공공기관의 경우 갑을관계가 아닌 상호 동등한 입장으로 계약하기도 한다. 여하튼 여러 종류의 갑들이 있는데 늘 을로 일하는 낮은 지위의 아티스트로서 경험을 풀고 싶다.

크게 두 부류의 갑이 있다. 똑똑한 갑과 멍청한 갑.

똑똑한 갑은 대기 공간을 마련해주고 음료와 간식을 챙겨주며 주차 문제를 걱정하지 않게 배려한다. 무대의 크기나 구조물의 설치를 위한 거리 측정, 조명 음향부터 관객과의 거리를 고려한 구성, 리허설 때 작은 동선까지 체크한다. 일단 전담하는 담당자가 존재한다. 이들은 깐깐하며 가끔은 이런 것까지 챙겨야 하나? 싶을 정도로 귀찮게 굴지만 그런 태도 덕분에 변수 없이 무대를 잘 마칠 수 있게 된다. 작품도 소중히 생각해 준다. 전후 관리가 완벽하다. 그런 갑질(?)은 기분좋게 상대한다. 다시 만나고 싶은 갑이다. 을에게 있어서 정말 최악은 멍청한 갑을 만난 경우다. 간혹 대행 능력이 있긴 한지 의심되는 자들이 있다. 현장에서는 어떤 말도 티도 내지 않지만 섭외되어 일하는 사람들의 흐름이나 장비 및 어떤 사인물만 봐도 가늠이 된다. 일단 가장 황당한 상황은 무대 자체가 없는 것이다. 대기장소는 바라지도 않는다. 조명도 음향도 없는 무반주다. 나를 왜 섭외한 건지 도대체 알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진행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수준의 행사.

아마도 그들 또한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다. 시간 문제, 경제적 여유, 현장 상황, 관계적인 이유 등. 급하게 준비하느라 섭외도 구성도 진행도 그냥 모든 것이 헐겁고 빈틈이 가득하다. 상황이 이쯤 되면 이런 자에게 섭외된 나라는 사람에게도 어떤 의구심이 들게 된다. 을을 대하는 태도나 말에 존중은 없다. 우선 본인들이 우왕좌왕하느라 정신이 없고 현장이 어수선하다. 애초에 바라지도 않지만 기본만 해도 반은 가는데 그 와중에 외양만을 보고 나를 판단해 희롱하거나 더러운 농담을 일삼는 미친 자도 있다. 아주 극히 드문 경우고 믿기 힘들겠지만 아직도 그런 자들이 있다.

배려는 지능이다. 지능이 떨어지면 수행 능력도 소통 수준도 낮다.

진짜 몰라서 못 하고 의식 자체가 없어 그러는 것이 더 안타깝다. 멍청한 갑들과 일해 좋은 점이 있다면 인내심을 기르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된다는 것이다. 존중없는 태도에, 무대가 없고, 음향 장비가 없고, 대기실도 없고, 주차까지 불편하면 예민해지고 신경질이 나지만 사람이 뭐랄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련하고 강해진다. 척박한 환경에서 드세게 자라는 잡초처럼 상황을 극복하면서 단단해진다. 꼼꼼한 준비성이 생기고 그런 상황에서도 해내는 어떤 능력 같은 것이 생긴다.

행사를 여는 곳. 정확히 말하자면 행사를 대행하는 곳은 대행을 맡긴 고객을 만족시켜야 한다. 고객을 만족시킬 행사를 만들기 위해 어떤 목적을 갖고 을을 섭외하는 것일 텐데 자신의 고객을 만족시켜 줄 을에게 최소한의 대우를 하는 것이 성공적 일을 위한 기본 태도 아닌가? 너무 을 위주의 생각인가? 하긴 돈을 주는 쪽에서는 섭외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할 일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에게 대행을 맡기는 고객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는 걸까?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갑을관계는 돌고 돈다. 정말 일 잘 하는 갑은 을에게 잘한다. 그게 결국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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