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대 시인
박정대 시인

빅토르 초이(Victor Choi)는 1962년 6월 21일, 구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친조부 막심 초이(최승준)는 본래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 출생이었고, 후일 일제 강점기 초기에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간 고려인 출신이었다.

빅토르 초이는 1982년 키노Kino라는 그룹으로 첫 앨범 45(러시아 말로 소로크 피아트, 음반의 재생 시간이 45분이었음)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0년 8월 15일 소련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쿰스에서 교통 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우랄산맥 서쪽에서는 아마 가장 유명한 가수였을 것이다. 그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저항의 상징이었으며, 어떠한 정치 행위도 하지 않았지만 젊은이들이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하나의 독립 정부였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만 28세였다.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쪼이 쥐브(‘빅토르 최는 살아 있다’는 뜻의 러시아 말)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1990년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일간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죽음을 간추린다.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초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인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똑같았던 유일한 로커가 빅토르 초이다. 그는 그가 노래 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 그는 죽은 후에도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러시아 말로는 빅또르 쪼이, 영어권에서는 빅토르 초이, 우리말로는 빅토르 최라 불린다. 그의 정체성은 고향에서 강제 이주 당한 디아스포라 고려인 3세도, 레닌그라드 출생의 러시아인도 아니었다. 국경을 넘어선 곳에 그의 정체성이 있다. 그는 시를 쓰던 시인이었으며, 가수였으며 탁월한 한 명의 예술가였다.

한장의 사진(위)이 있다. 캄차트카라는 곳에서 화부로 일했던 빅토르 최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차 한잔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가수로 유명해졌을 때도 경제적으로 여전히 궁핍했으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화부 일을 계속했다. 석탄이 묻어 있는 그의 운동화가 모든 걸 말해준다. 시의적절한 시론(時論)을 쓰는 코너에 웬 빅토르 최냐구요?

정치와 사회,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곳에 예술이 있다. 그러나 예술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곳에 스스로 강력한 영혼의 정부를 구성하여 또 하나의 아름다운 정치와 사회가 된다. 나는 빅토르 최가 그립다. 빅토르 최 같은 젊은이가 그립다. 수많은 청춘이 함성을 외치며 행진하던, 어떤 저항의 멜랑콜리가 그립다. 우리는 지금 마음속에 자기만의 열렬한 독립 정부를 갖고 있는가?

“손에는 담배를, 탁자에는 찻잔을. 그 외 나머지는 모두 우리의 내면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그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본다. “손에는 펜을, 탁자에는 종이를. 어쩌면 이 세계는 글로 쓰인 한 장의 종이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라고.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그대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있을 것이다. 그대는 부디 아름답고 행복한 추석 보내길,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행복의 한복판에 있길. 그대들은 부디 아름다운 시절에 살기를,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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