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토한 물안개

연탄을 할퀴고 간 태풍의 손톱



도막도막 잘린 물간 혓바닥

고딕으로 인쇄된 생선들의 비명



눈물의 낙차로 돌아가는 터빈

공장에서 찍어내는 울음



그 안에 하얀 그을음



*최수진, 「울음 앓는 날」,『Mrs. 함무라비』, 2023, 소금북시인선



울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온 적이 내게도 있었던가. 슬픔을 담는 그릇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나이가 들수록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다가올 슬픔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일까. 옷깃을 여밀 때가 오면 어김없이 연탄 나르기, 김장 나누기 봉사가 한창이다. “새벽이 토한 물안개”가 마을을 뒤덮고 “연탄을 할퀴고 간 태풍”이 싸늘하게 식은 구들장을 괴롭힐 무렵, 온정의 손길은 이어진다. 형식적인 연례행사라도 좋다. 다가올 추위에 ‘성냥 하나’라도 켤 수 있다면 말이다.

여기 점점 꺼져가는 ‘촛불’이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 20주기, 세월호 참사 9주기 그리고 이태원 참사 1주기. 매년 ‘그날’이 오면 언론은 앞다퉈 “고딕으로 인쇄된” 슬픔을 “공장에서 찍어”낸다. 그들의 슬픔을 가늠조차 할 수 있을까. ‘불’에 그을린, ‘물’에 잠긴, ‘거리’에 쏟아지는 눈물들. 그들의 죽음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죽음 앞에 무감각한 마음들일 것이다.

사고를 겪은 피해자(생존자)와 유족들에게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고 손가락질 하는 이들. “물간 혓바닥”으로 살아남은 이들의 절규를 보상금과 결부시키는 이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갈수록 연약해지고 있다.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자밀 자키는 그의 책 ‘공감은 지능이다’에서 “공감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연습을 통해 키우고, 목적과 필요에 따라 높이거나 낮출 수 있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시도 때도 없이 슬퍼하라는 게 아니다. 각자의 삶을 영위하면서 타인의 아픔을 함께 껴안고 나눌 수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사고는 현재진행형이다. “눈물의 낙차로 돌아가는 터빈”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무책임하고 안일한 대응 또한 마찬가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보잘것없는 내 눈물이 “하얀 그을음”만 남긴 채 가슴 속에서 휘몰아친다.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추모 공간, 뉴욕의 9·11 테러 추모 공간은 매일 시민이 지나다니는 곳에 있다. 참사가 반복되는 대한민국에 언제든 마음껏 슬퍼할 공간이 있을까.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뼈아프다. 박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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