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쌓인 삶의 능선에 나는 무엇을 쌓았나
세상에 치인 마음이 향한 곳 어머니 고향
홍천과 춘천 걸쳐진 해발 1051m 가리산
고깔처럼 뾰족 솟은 봉우리 볏가리 닮아
4년 만에 산 오르며 지나간 세월 돌아봐
앙상한 겨울 숲 그 속에서 생과 삶 생각
꼭대기 오르니 하루 동안 걸은 길 한눈에
한평생 마을 이뤄 살아온 이들 궤적 보며
문득 당신 꿈꿨을 저 너머의 세상 떠올려

▲ 가리산 제1봉에서 바라본 천현리 풍경. 산의 겨울 능선이 푸근하다.
▲ 가리산 제1봉에서 바라본 천현리 풍경. 산의 겨울 능선이 푸근하다.

어느덧 2023년의 마지막 편지를 부칩니다. 그동안 잘 지냈나요? 오늘도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고 텅 빈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습니다. 기한이 빠듯한 일들을 먼저 치르고 나서야 한숨 돌리며 겨우 마주하는 이 여백은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을 경유하는 이 여정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지금의 저로서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해가 바뀌면 알 수 있을까요? 오늘도 답장 없는 편지를 쓰며 나는 나를 견딥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한 해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성취로 귀결된 일들은 일말의 자신감을 주었고 잘되지 않은 일들은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게 했지요. 돌아보되 너무 많이 돌아보지는 말자고 굳게 다짐했던 이유는 오랜 시간 내가 나를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의심하고 책망하며 적지 않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내가 원하고 기대하고 바라고 사랑하는 것들을 부러 외면하기도 했고요. 왜 나는 나를 그토록 밀어내려 했을까요? 저는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세상의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동안 마르고 닳은 마음은 다시 산을 찾고 있었습니다. 적설(積雪)의 풍경을 꿈꾸었으나 이상 기온 탓에 당분간은 요원한 장면일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산행은 아무래도 특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한참 고민하다가 이번만큼은 그 어떤 근거나 목적 없이 순전히 가슴이 이끄는 곳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가 아니라 ‘어디에 가고 싶은지’를 스스로 물었습니다. 마음의 나침반은 내 어머니의 산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가리산은 어머니의 고향인 홍천의 산입니다. 홍천군 두촌면과 화촌면, 춘천시 북산면과 동면에 걸쳐 솟은 해발 1051m의 크고 높은 산이지요. 한자는 더할 가(加)에 마을 리(里)를 쓰고 있으나 단어만으로는 어쩐지 산의 의미가 확연하게 와닿지는 않습니다. 궁금해서 이런저런 문헌을 좀 더 찾아보니 가리란 순우리말로 단으로 묶은 곡식이나 나무 따위를 차곡차곡 쌓아둔 큰 더미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고깔처럼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가 흡사 볏가리처럼 생겼습니다.

홍천 읍내를 빠져나와 44번 국도를 한참 달리던 차는 천현리로 들어섭니다. 가리산 홍천 방향 들머리인 가리산자연휴양림이 위치한 동네입니다. 길은 4차선에서 2차선으로 바뀝니다. 주변에 번듯하게 올린 전원주택 몇 채가 보이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몇 군데 눈에 띄는데 영업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가리산이 보입니다. 그 모양새가 영락없이 볏가리를 닮았습니다. 왜 가리산이라고 부르는지 절로 수긍이 갑니다. 산은 당장이라도 오를 듯 가까워 보이기도 하고 그림처럼 닿을 수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가리산자연휴양림에 주차하고 오전 10시쯤 산행을 시작합니다. 휴양 시설인 숲속의 집을 끼고 한동안 잘 닦인 외길을 걷습니다. 평일의 자연휴양림은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조용합니다. 시즌이면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로 종일 왁자한 가리산레포츠파크도 지금 시절에는 썰렁합니다. 약간은 한적한 기분으로 얼마간 걸으니 오른쪽으로 낡은 건물 하나가 불쑥 나타납니다. 가리산 강우레이더관측소입니다. 날씨 탓인지 분위기가 조금은 을씨년스럽습니다.

가리산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처음 가리산을 올랐을 때가 2019년이었으니 어느덧 4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요즘은 툭하면 지난 세월을 손가락으로 세며 탄식합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느냐고. 잃어버린 시간 앞에서 당신은 세상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작심해서 공모하고 나를 속이는 것만 같다고요. 그럴 만도 합니다. 그 많은 시간을 우리는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보냈을까요? 이렇게 묻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사라집니다. 강우레이더관측소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계곡과 계곡이 만나는 합수곡에 이르고 산길은 응당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무쇠말재를 거쳐 가리산 정상인 제1봉으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가삽고개를 넘어 제3봉과 제2봉을 차례대로 지나 제1봉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정상인 제1봉까지 무쇠말재 코스는 약 2.5㎞, 가삽고개 코스는 약 3.5㎞입니다. 원점회귀 코스이니 어느 쪽으로 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단순히 정상에 조금이라도 빨리 닿고 싶은 마음에 무쇠말재로 올라가 가삽고개로 내려오기로 합니다.

계곡을 가로질러 곧장 이어지는 산길은 꾸준한 오르막입니다. 가리산자연휴양림의 평균 고도가 300m쯤 된다고 할 때 1051m의 정상까지 꼬박 800m가량의 표고를 올려야 하므로 그럴 만도 합니다. 4년 전에도 이 길을 올랐습니다. 한데 분명 같은 길인데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때는 한여름이었고 지금은 초겨울이긴 합니다. 두 계절의 산은 달라도 아주 다르지요. 그런다 해도 이렇게 까마득할 수 있을까요? 그사이 오른 산을 헤아려봅니다. 올해만 해도 참 많은 산을 올랐습니다.

산은 포근합니다. 겨울 강추위를 걱정한 나머지 잔뜩 걸쳐 입은 옷가지를 한 겹 벗고 가던 길을 재촉합니다. 과거였다면 지금쯤 눈이 쌓이고도 남았을 텐데 강원도의 이슥한 산간 지대도 기후 재앙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갈잎 다 떨어지고 황망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 사이로 새파란 바람이 붑니다. 문득 한자리에서의 삶을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이번 생이 이울어가는 당신에게 세상은 어떤 곳이었나요? 삶의 수레바퀴가 몇 차례 도는 동안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강산이 변하는 데는 이제 10년도 채 필요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암봉(巖峰)으로 이뤄진 정상과 가까워지며 오래전 기억이 어슴푸레 떠오를 것 같았는데 눈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나무 계단이 장성처럼 솟아 있습니다. 4년 전 여름, 사람이 두 다리로 걸어갈 수 없는 지점부터 밧줄과 철제 난간이 설치돼 있어 암벽 등반하듯 낑낑거리며 올랐던 산이었는데 말입니다. 나무 계단으로 우회해 천천히 걸어 오르는 산은 편안하지만 어딘지 아쉽습니다. 온몸으로 역경과 난관을 극복하며 확인했던 과거의 기강 따위가 새삼 그리워집니다.

거대한 산정에 오르니 우리가 오늘 하루 거슬러 들어온 모든 길이 한눈에 보입니다. 육중한 수림이 제 숨을 거두는 끝에 비로소 사람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도 이 자리에 서니 보입니다. 당신이 한평생 한자리에 뿌리내리고 나를 키웠던 모습도 이러했겠지요. 눈앞으로 켜켜이 쌓인 능선 앞에서 여지껏 내가 내 안팎에 쌓은 것들은 무엇이었나 잠시 생각합니다. 이 산의 북편으로 넘어가면 소양강입니다. 한 번도 넘어가지 않은 땅. 그 어느 날 당신이 꿈꿨을 저 너머의 세상이 보고 싶습니다. 작가·에디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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