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12월 11일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국회 로텐더홀에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철회와 문재인 정권 국정농단 규탄’ 무기한 농성을 시작하면서 바닥에 ‘나를 밟고 가라’라는 플래카드를 펼쳤다. 더불어민주당이 선거법과 공수처 설치법안 등을 다음날 본회의에 상정하겠다고 하자, “문재인 정부의 반민주 폭거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며 농성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며칠 후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설치법안은 통과됐다. 황 대표가 ‘나를 밟고 가라’라며 목숨을 걸고 막겠다고 했지만, 뚜렷한 대안 없이 강경 투쟁으로 일관하다가 무기력하게 법안 통과를 허용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당내 인사인 홍준표 전 대표의 지도부 사퇴와 통합 비대위 구성을 요구하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20년 제21대 총선을 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2009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평생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경찰은 명동성당으로 쫓겨온 수 백명의 시위대를 강제 연행하겠다고 하자, 김 추기경은 이에 “나를 밟고 가라”라고 했다. 김 추기경의 결연한 태도에 명동성당을 에워쌌던 경찰 병력은 물러났다. 김수환 추기경의 ‘자신을 밟고 가라’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역사가 됐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던지겠다는 이 말이 갖는 의미가 그만큼 크고 무겁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 말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상황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특히 정치적으로 소비되는 순간 그 의미는 퇴색되곤 했다. 역사적 평가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지난 12일 원조 ‘윤핵관’으로 꼽히는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이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그 역시 ‘나를 밟고 가라’라는 말을 남겼다.

역사는 그의 이 말을 어떻게 평가할까. 본인은 숙고 끝에 남긴 말이겠지만, 타의로 밀려나는 상황을 모르지 않는 국민으로서는 ‘나를 밟고 가라’라는 그의 말이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천남수 강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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