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우 한림대 연구교수
이공우 한림대 연구교수

존경하는 공직 선배의 산수(傘壽)연이 있었습니다. ‘강원도정’이라는 무대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오랜 세월을 동행했던 후배들이 마련한 조촐한 잔치였습니다. 비록 젊음과 패기는 사라졌지만, 그때의 그 방향성, 그 가치관만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을 공감하며, 마냥 행복했던 자리였지요. 깊어가는 가을밤에, 연륜도 거기쯤에 이른 사랑하는 선배의 삶을 축복하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모임 흔치 않아!”를 선창하며 건배를 제의해 참석자 일동이 복창했듯이, 그는 정말 보기 드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업무적으로 대단했습니다. 이른바 ‘요직(要職)’이라 일컫는 자리가 그에게는 따로 없었지요. 어떤 일을 맡든 보석처럼 빛나게 성취함으로써, 그 자리를 요직으로 만드는 탁월한 역량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의 이름이 봉의산 자락에 쩡쩡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퇴직하고도 다시 스무 해가 지난 것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유명한 말은, 맥아더 원수가 미국 의회에서 행한 고별 연설의 말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어디든지, 누구에게나 호(好) 불호(不好)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존경심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신실한 것 같습니다. 그를 해임했던 트루먼 대통령은 물론, 월남전을 두고 정치적 견해가 달라 그와 반목했던 존슨 대통령도,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위대한 영웅에 대한 예우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국민적 사랑과 추모의 정신이, 미국인들 마음속에 그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노병으로 남게 된 원천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으로 국내 사정을 살펴보면,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국면들이 많습니다.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사실(史實)을 다루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이념과 권력적 잣대를 들이대기 일쑤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민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 없는 다수, 관조하는 듯한 군중은 다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수양대군이 향하던 ‘집권의 길’에서, 성삼문 등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던 신숙주. 실록이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필부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숙주나물’에 얽힌 전설은 그가 ‘변절자’였음을 우리 모든 장삼이사에게까지 웅변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깨어있는 대중의 무서움이요, 그들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에도, 모름지기 ‘노병을 죽지 않고 사라지게 하는 일’이 아주 난망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의 슈퍼스타 손흥민 선수! 손흥민 선수의 유럽 통산 득점이 차범근 감독의 그것을 넘어섰을 때, 국내 언론은 ‘마침내 손흥민이 차범근을 넘어섰다’며 이른바 ‘차범근·박지성·손흥민 논쟁’에서 손흥민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결론짓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받은 손흥민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명쾌했지요. “내가 100호 골을 넣든, 200호 골을 넣든 나는 절대로 차범근 감독님을 넘어설 수 없다. 내가 넘어선 것은 단지 골일 뿐이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차범근 감독님이 개척하고 걸어가셨던 길, 그것이 지닌 한국 축구에서의 의미와 업적을 어떻게 넘어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게 손흥민의 인성이요 외국인들이 그를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이런 후배들에 의해 차범근, 박지성을 비롯한 수많은 축구인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 각 분야가 다 그런 게 아니겠어요?

우리 공직사회에서도 오늘의 기준으로 선배들을 평가하려는 경향성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청출어람이라고는 하지만, 직업이라는 명제에서, 그들이 넘어섰다 한들 그것은 직(職)이지 업(業)이 아닙니다. 적어도 업의 차원에서, 선배들이 쌓아놓은 거탑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도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그들만의 원대한 창업의 역사가 있겠지만, 그 또한 선배들의 그것이 바로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간단한 진리가, 세월과 더불어 후배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면면히 이어 흐를 때, 비로소 ‘공직사회의 노병’들은 죽지 않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며,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 국가와 향토를 수호할 것입니다. 재야의 많은 원로 공직자님들의 강녕을 충심으로 빕니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