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팥죽을 대문에 뿌려 액운을 없애는 풍습이 있었다. 중국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를 보면 ‘공공씨(共工氏)에게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는데 동짓날에 죽어 악귀가 됐다. 팥을 무서워하므로 동짓날 죽을 만들어 쫓는다’고 했다. 여기서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고 대문에 뿌리는 전통이 생겼다. 누구는 악귀를 물리치는 음식이어서 제사에 써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었지만 팥죽에 꿀을 타서 명절 음식으로 제사에 올리기도 했다.

그 시절 동지가 되면 관상감(觀象監)이 달력인 역서(曆書)를 나눠줬다. 관상감은 천문·지리·기후 관측·강우를 담당했다. 누런 표지나 흰 표지로 잘 포장해 국왕이 하사하는 서적에 찍는 동문지보(同文之寶)를 날인해 관리들에게 전달했다.

이조의 하급 관리는 각기 전담해 임명장(告身)을 써주는 관원들이 있었다. 관원이 지방 수령으로 나가게 되면 고생한 서리에게 당참전(堂參錢)을 주어 감사를 표했다. 서리는 작은 설(亞歲)이라는 동지가 되면 으레 푸른 표지로 장정한 역서 한 권을 관원에게 바쳤다. 당시 도성에서는 단옷날이 되면 관원이 서리에게 부채를, 동짓날이 되면 서리가 관원에게 역서를 주고 받았다. 여름 부채와 겨울 달력(夏扇冬曆)이라는 말의 연원이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이 귀했던 시절 달력 한 장이 없었다. 근엄한 표정의 대문짝만한 국회의원 얼굴을 가운데 박고 월력 12개를 가장자리에 두른 달력이 인기였다. 시골집 벽 한쪽에 붙여놓고 1년을 지냈다. 한 해를 국회의원 달력을 모시고 살다보면 그 어르신이 가족처럼 정겨웠다. 아버지, 어머니, 막내 고모, 사촌 누나, 외삼촌, 형, 동생 그리고 댕댕이가 식구로서 밥그릇을 나누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용산 대통령실이 지난 18일 출입기자들에게 새해 달력을 돌렸다. 탁상용과 벽걸이 달력을 무릎 담요와 함께 선물했다. 디지털 달력의 빼곡한 일정에 쫓겨 하루하루 분주히 사는 세상에 종이 달력을 주고받는 풍습이 아직 살아있다니 참 신통방통하다. 남궁창성 서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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