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부푼 노란 꽃송아리 바람타고 골목에 깃드는데…
스페인 화가 무리요 작품
어린이 그림 친근함 가득
대단하고 화려한 주제보다
소박한 어린이 그림 편안
도시 골목 적막만 감돌아
와글와글 엉머구리같은
어린이 고함 함성을 기대

▲ 이광택 작, 개나리꽃 핀 도시의 밤 41-36  2023
▲ 이광택 작, 개나리꽃 핀 도시의 밤 41-36 2023

어린이를 많이, 그리고 잘 그린 화가가 생각난다.

스페인의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 그의 그림을 보면 괜히 행복해진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작품에는 가난하지만 순박한 아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과일 파는 오누이, 꽃을 파는 소녀, 속옷을 뒤져 이를 잡는 소년 등등. 부모를 일찍 여의고 거리로 나온 고아들일까? 굴왕신 찜쪄먹게 꾀죄죄한 차림으로 옷은 해지고 신발조차 신지 못한 형편이지만,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아이들의 얼굴에는 항상 해맑은 햇살이 비치고 있다. 하나같이 구김살이 보이지 않고 천진난만하다. 가난하지만 삶을 긍정하고 소박한 행복을 느끼지 않고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표정들이다. 무리요의 어린이 그림이 유독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그림에 그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리요 역시 일찍 부모를 잃고 빈궁하고 고단하게 살았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퍽 낙천주의자였나보다. 그가 그려낸 어린이들은 한결같이 불쌍하고 비천한 모습이 아니라 웃음이 있고 여유로움까지 가지고 있지 않은가. 신화와 역사, 종교라는 대단하고 화려한 주제를 그린 그림들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겠으나, 당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무리요의 소박한 어린이 그림들에서 오히려 편안한 친근함을 느끼고 잔잔한 감동을 받는다. 건조한 우리 삶을 촉촉하게 해주는 수분크림 같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갑자기 조선시대의 책벌레라며 자신의 호를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라 칭한 학자 이덕무 선생의 인생 좌우명이 머리를 스친다.

“가난에 대처하는 가장 훌륭한 태도는 가난을 아예 잊는 것이요, (중략) 가장 비루한 태도는 끝까지 가난을 원망하다가 그 가난에 치여 죽는 것이다”

도시의 뒤편으로 이어진 야트막한 동산이 푸른 어둠으로 물러나 있다. 자늑자늑한 봄밤의 기운이 맞은바람을 타고 골목에 깃드는데, 달과 별 밭을 등지고 선 건물들 사이로 노란 꽃송아리들이 솜사탕처럼 한껏 부풀어 있다. 내 고향 춘천의 꽃, 바로 개나리꽃이다.

금방 저녁을 먹었는지 불 꺼진 집이 없다. 노란 전등 불빛은 모두 잘 익은 참외 색깔이다. 조붓한 골목에 개구쟁이 꼬마들이 나타났다. 조잘조잘, 재잘재잘하는 말소리가 고즈넉함을 깬다. 흐벅지게 핀 개나리 색깔로 무언가 저마다의 가슴에 추억을 쌓을 놀이를 궁리하나 보다. 머지않아 달빛이 사선으로 기울면 놀이에 지친 아이들의 소란스러움도 삭여지고 집으로 향하는 꼬마들의 뒷모습이 해읍스름한 궤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다가 끝내 골목의 어둠에 묻힐 것이다. 그때에서야 사위는 무릇 잠잠해질 것이고 어슴푸레한 달그림자만 무심한 듯 집들의 울 안으로 번지면서 달빛에 부딪힌 장독대만 유난히 반짝이리라. 그리고 밤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달빛은 손금을 보게 밝을 것이다. 꼬마들의 늦은 잠도 다디달 것이고.

이 그림도 역시 어린 시절의 정경을 떠올리며 그렸다. 이제까지 그린 개나리 그림 중 가장 마음에 든다. 보드랍고 훗훗하고 정겹고 상큼한 느낌마저 들기 때문이다. 조금이나마 고향에 진 빚을 갚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개나리를 시화(市花)로 정한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해마다 사월이 되어 춘천이라는 도시를 덮는 노란 개나리꽃의 흐벅진 정경은 실로 성관(盛觀)이 아닌가. 좀 더 많은 미술인이, 시민이 개나리꽃으로 물든 춘천의 풍경을 작품으로 푸짐하게 남기면 좋겠다. 나 역시 이젠 좀 대작으로 도전해 보고 싶다. 화의(畵意)인가? 뭔가가 가슴 속에서 꿈틀거린다. 좋은 징조이다.



시대가 바뀌어 이젠 도시의 골목길에서 꼬마들의 함성을 듣기가 꿈에 용 보기만큼이나 어려워졌다. 어쩌다가 우리 도시의 골목들이 이렇듯 생기를 잃고 어둑발만 시커멓게 내려앉은 채 적막이 감도는 살풍경한 모습으로 변해버렸을까? 시간과 무진장의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출산 장려 정책은 그야말로 게 등에 소금 치기, 어느새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게 되어버렸다. 삶은 달걀 열 개를 먹고 물을 못 마신 것처럼 갑갑하고 답답하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만큼 정부와 국민이 더욱 지혜를 모아야 하겠다. 언제에야 도시의 개나리꽃밭에서 참꽃 같은 어린이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을까. 와글와글 엉머구리 같은 고함이어도 좋으니 제발 좀 그 시절이 빨리 오길 기대해 본다.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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