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박한 언어가 끄는 뗏목꾼의 삶, 서사의 강 위에 띄웠다
역사학과 졸업·어린이 역사서 편찬
2019년 출간 ‘정선’ 민중 애절함 담아
수탈·차별 역사 속 서정·서사 조화
정선아라리 가락·혼 특유 언어 표현
정선뗏목아리랑 20편 이야기 구성
시인 과거 모습 의도적 주인공 설정
뗏목꾼 사랑·분노·화해 담은 서사시
개인 삶 소재 역사적 통찰 작법 고안

전윤호 시인이 최근 시집(사진)을 냈다. 그것도 장편 서사시다.


- 정선, 서사시

소설 쓰는 이는 단편을 넘어 장편소설을 쓰고 싶어 하고, 시를 쓰는 이는 장편 서사시를 쓰고 싶어 한다. 미술도 예외는 아니다. 작은 그림보다 대작을 그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같다. 그 열망과 꿈이 실현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여서 오페라나 교향악은 음악의 정점이다. 천재적이거나 위대한 작곡가가 아니고선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 정선 아우라지 뗏목
▲ 정선 아우라지 뗏목

그런데 전윤호 시인이 장편 서사시를 탈고하여 책을 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장편 서사시를 쓴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신동엽의 ‘금강’과 김지하의 ‘오적’을 나는 읽었다. 이들 작품은 사회적 반향도 그만큼 컸다. 이후에 여러 편의 서사시가 나오긴 했지만, 이 두 편 외에는 문학적 성과를 거둔 서사시를 일찍이 나는 접한 바가 없다.

나는 2016년부터 정선 아우라지를 시작으로 3년 동안 한강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 한강을 소재로 서사시를 쓸 시인은 누구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정선 시인으로 네 분의 뛰어난 시인이 있는데 그중 전윤호 시인이 불현듯 떠올려졌다. 정선아라리의 가락과 혼을 노래할 시인은 전윤호가 가장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 2019년 시집 ‘정선’을 출간했을 때 필자와 함께 찍은 사진
▲ 2019년 시집 ‘정선’을 출간했을 때 필자와 함께 찍은 사진

전윤호는 대학에서 역사학과를 졸업한 뒤, 많은 어린이 역사서를 펴내고 있는 시인이다. 그리고 정선을 그 누구보다 마음으로 사랑하는 시인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자, 의사였던 큰형이 막내인 시인을 보살펴주었다. 그런 형이 이년 전 세상을 등졌다. 큰형은 시인의 정신적 지주였다. 비록 형은 없지만, 정선에 가면 늘 형이 있다고 생각했다.

전윤호의 시엔 유난히 정선을 소재로 한 시가 많다. 2019년 그가 낸 시집 제목이 아예 ‘정선’이었다. 그 시집은 모두 정선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만약 전윤호 시인에게 누가 정선을 빼앗아 간다면 그는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


전윤호의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누구든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시가 평이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고 친근하다. 어려운 시어가 별로 없다. 그래서 시를 모르는 사람도 잘 읽힌다는 평이다. 그것엔 정선만의 질박한 언어가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단순하다. 하지만 그 단순함을 통해 깊은 통찰과 역사의식을 느끼게 해준다.

시의 화자는 바로 ‘읽는이’ 자신이다. 또한 자신의 가족과 이웃들과 마을의 오래 묵은 이야기가 전윤호 특유의 어법으로 전설처럼 창조된다. 개인의 서정성과 서사가 조합된 전윤호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시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서정이면서 서사이고, 서사이면서 서정이다. 아마도 이것이 전윤호만이 구사할 수 있는 특유의 매력이 아닐까.

▲ 전윤호 시인
▲ 전윤호 시인

고향은 낡고 오래되었으나 늘 시인을 새롭게 일깨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처럼 낙향한 지식인의 소일거리 풍경이 아니다. 전윤호의 눈빛엔 민중들의 선한 슬픔과 삶의 애환이 그렁그렁 고여 있다. 깊은 산골 굽이굽이 계곡을 흐르는 정선의 강은 온갖 시름을 안은 채 서울로 흘러간다. ‘정선뗏목아리랑’은 민중의 소리를 담아 고단한 삶을 면면히 이어간다.

수탈과 학대, 차별과 억압을 받으면서도 수모와 절망을 새로운 긍정의 힘으로 극복해낸다. 그것을 노래로 승화한 것이 ‘정선아리랑’이요, 그것을 역사적 맥락에서 이야기한 것이 ‘정선뗏목아리랑’이다.

정선의 역사엔 휘어지면서도 바람에 저항하는 억세디억센 삶이 투영되어 있다. 하얗고 비극적인 억새의 휘날림. 그 순결한 휘날림엔 민중의 애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이 무언의 외침은 다함 없고 굽힘 없는 생명력의 몸짓이다.

▲ 그의 작업실 ‘끄적당’
▲ 그의 작업실 ‘끄적당’

정선뗏목아리랑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은 네 사람이다. 주인공 감재는 전윤호 시인의 백년 전 모습이다. 이 설정은 의도적이다. 정선뗏목아리랑은 허구의 플롯을 설정하고 다시금 정선의 가락인 정선아리랑을 접목한다. 강은 그렇게 수탈의 역사인 뗏목을 타고 서울로 떠내려간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분노, 용서와 화해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뗏목꾼은 험난한 여울에서 만나는 죽음과 치열하게 투쟁한다.

‘정선뗏목아리랑’은 독특하게 스무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의 주제어가 타이틀로 제시된 다음, 서정적인 가락이 고딕체로 등장한다. 독자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과정을 이 서정적 가락에서 암시받게 된다. 그리고 한 송이 눈꽃(*)이 반짝 눈 뜬 다음, 본격적인 서사가 이루어지는 구조이다. 이런 구조로, 편편의 작은 이야기들이 연속하여 끝날 때까지 변함없이 일관된다. 시인이 마련한 세심한 이 장치는 새로운 서사시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설가들은 피카레스크의 기법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면에선 맞다. 하지만 어느 면에선 전혀 다르다. 서정과 서사의 이 만남은 우리 민중의 소소하고 아픈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영웅적인 큰 목소리를 여기에선 들을 수 없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민중의 삶이다. 어느 영웅담으로 가려질 그런 하찮은 삶이 아니다. 시인은 그 역사 속에 민중의 소리를 시인의 가슴으로 증폭시켜 우리에게 들려줄 뿐이다. 그것이 아픈 사랑이든, 권력자의 수탈이든, 민생의 고통이든, 있는 그대로를 서사시의 전개를 통해 보여준다.

▲ 정선 아우라지
▲ 정선 아우라지

정선뗏목아리랑은 하나의 텍스트이다. 이 이야기는 음악이 될 수도 있고, 연극이 될 수도 있으며, 무용이 될 수도 있다. 종합적인 융합예술로서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 텍스트가 바로 서사시 ‘정선뗏목아리랑’이다.



- 시인의 뒷이야기

개인의 서정이 풍부한 ‘정선아리랑’은 민중의 애환이 담겨 있는 다중 창작문학이다. 여기에 민중의 삶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선 역사적 배경의 서사시가 요구된다. 이에 전윤호 시인은 개개인의 삶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통찰하는 전윤호만의 작법을 고안해 냈다. 전윤호 시인은 고향 정선으로 돌아왔다. 20여 년간의 유랑을 끝낸 시인은, 장렬2리 마을회관에 자리를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식을 접한 최승준 정선군수가 흔쾌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사의 주 무대인 여량면 관계자들, 진용선 정선아리랑 연구소장, 시인의 친구들, 이웃들도 도움의 손길을 주저 없이 주었다. 일 년의 시간 동안, 현장을 답사하고 돌아와 글쓰기를 반복했다. 이야기의 현장을 찾아 시를 다듬고 고치기를 일 년을 넘겼다.

강원도에서 첫 서사시가 탈고되었다는 이 사실 하나로도 우리는 충분히 박수를 보내야 한다. 지금까지 전윤호 시인은 아동교양역사서, 소설, 동화, 기행문 등 40여 권의 책을 펴냈다. 시집도 11권이 나왔다. 15년 전, 갑자기 몸에 이상이 왔었다. 대동맥박리증이라는 희귀병이었다. 유랑이 시작되었다. 걷다가 죽자는 생각이었다. 서해, 동해, 내륙 오지, 춘천 등 전국을 돌아돌아 다시 정선 고향으로 찾아들었다.

이제 전윤호 시인은 60을 바라보는 나이. 시마(詩魔)가 찾아든 것일까. 하루에도 두세 편, 어느 땐 대여섯 편씩 써댔다. 봇물 터지듯이 글이 펑펑 솟아났다. 이제 그는 쉬지 않을 것이다. 정선의 무릉도원에 도달한 그에게 또 다른 글쓰기가 시작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정선에 존재하는 한, 그는 정선에 대한 글쓰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전윤호에게 주어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므로. * 시인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