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등 꺼지고 텅 빈 골목…전쟁의 아픈 역사 낙인으로 남다
소양동 캠프페이지 미군 대상 성업
지역경제 먹여 살리던 시절 술집 즐비
춘천지역 대표 집창촌 ‘장미촌’ 등장
떡·닭갈비 장사부터 우연히 화류계로
남북 분열, 도시·주민 삶 전체 흔들어
2000년대 전국적 철거 대부분 원주로
최대 번화가서 인구감소 구도심 ‘쇠락’

6·25 전쟁이던 1950년대초. 춘천 작은 마을(서면 일대)에 미군들이 들어온다. 마을 사람들은 깃발을 흔들며 미군들을 맥없이 환영한다. 그리고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소란이 생기고 그날 밤 과부인 언례가 집에 침입한 미군 2명에게 윤간당한다. 동네의 멸시 속에서 이를 악물고 살던 어느 날 강 건너로 미군부대가 들어온다. 2000년대까지 유지돼온 춘천의 캠프 페이지다. 그 부대를 중심으로 속칭 양공주들이 머물게 된다. 마을 근처에 작은 움막에서 매춘을 준비하던 용녀와 순덕은 언례에게 양공주가 될 것을 제안하고 결국 용녀와 순덕이 운영하는 클럽을 찾아가 일한다. 미군 문화가 춘천 소양로 일대에 유입되면서 전통 질서는서서히 무너진다. 마을사람들은 용녀와 순덕, 언례를 마을에서 쫓아내려고 하지만, 손님인 미군들 덕에 번번이 무산된다. 소양로 아이들은 유엔군의 쓰레기장을 뒤지고 언례가 일하는 클럽 안을 훔쳐보며 일상을 지낸다.

안정효의 소설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내용이다. 소설 작품 속 은마는 서면 금산리 장군봉 전설에 등장하는 용마를 가리키며 세상을 구원해 줄 위대한 인물을 기다리는 영물이다. 세상을 구원해줄 영웅을 태우고 나타나야 할 은마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세상을 구원해줄 수 없음을 상징한다. 소설가 안정효는 1963년 글을 쓰기 위해 춘천을 찾았다가 춘천을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

장미촌과 소양로는 1950년대에서 시작돼 2000년대까지 50여년을 관통하는 춘천의 살아있는 역사다. 미국의 소비문화가 밀려들며 번영과 타락의 상징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장미촌 철거와 소양로 재개발로 인해 도시는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한 때의 영화와 쇠락은 지역 곳곳에 낙인처럼 남아있다.

 

▲ 1971년 사창고개 모습 사진제공=춘천문화원
▲ 1971년 사창고개 모습 사진제공=춘천문화원

도시는 개개인 삶의 총합이다. 때로는 개인의 삶이 도시의 색을 규정하기도 한다. 춘천 소양동도 다르지 않다.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였고 미군이 주둔했다. 도시는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미군을 상대로 한 장사가 성업을 했고 인근 번개시장에는 강 건너 서면 주민들까지 몰려들었다. 집창촌인 ‘장미촌’도 이쯤 생겨났다. 이후 70년. 이제 모두 옛 일이 됐다.

기와집골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번개시장은 이제 또 다른 회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요선터널은 그 생명을 다 한지 오래다. 사람들은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소양동은 최대 번화가에서 인구 감소를 걱정해야 하는 구도심이됐다. 강원특별자치도청사 이전, 캠프페이지 도시재생 혁신지구 후보지 지정 등 소양동을 중심으로 한 변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장미촌 이야기

▲ 2003년 장미촌 일대 전경 본사DB
▲ 2003년 장미촌 일대 전경 본사DB

캠프페이지를 끼고 있어서일까. 소양동은 미군을 상대로 한 술집들이 즐비했다. 그야말로 소양동은 불이 꺼지지 않는 동네였다. 이 모(88·여)씨는 소양동에서 소위 말하는 ‘아가씨 장사’를 했다. 화류계 여성들에 대한 인식도, 인권의식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때다.

남과 북의 분열, 미군 주둔은 이씨의 삶을 좌지우지했다. 열 두살쯤 됐을 무렵 평양집에 중국군인이 들이닥쳤다. 이씨의 아버지를 폭행했고 아버지는 3일만에 눈을 감았다. 죽기 직전 아버지는 그에게 “엄마랑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오빠와 엄마 손을 잡고 강을 건너 도착한 곳이 춘천 서면이었다.


붕어섬 근처에서 살던 시절, 한 언니가 그에게 장사를 제안했다. 미군에게 사과를 팔자는 제안이었다. 본인 사돈집이 옆에 있으니 그 집에서 음식을 얻어다 팔면 된다고도 했다. 그렇게 그의 장사 인생이 시작됐다. 이후 찐빵 장사, 떡 장사, 국수 장사, 옷 장사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아가씨 장사’는 우연히 시작됐다. 닭갈비 장사를 하던 시절 누군가 근처에 큰 집이 있는데 세를 준다고 했다. 찾아가봤더니 ‘아가씨 장사’를 하는 곳이라 방이 안 나간다는 하소연을 듣게 됐다. 그렇게 이씨는 ‘얼떨결에’ ‘아가씨 장사’와 닭갈비 장사를 병행했다. 가게 간판도 없었다. 그냥 ‘아가씨 장사’였다. 150원이었던 화대는 어느 날 50만원으로, 100만원으로 뛰었다. 그 장사로 이씨는 아들을 대학까지 보냈다. 당시 소양동에서 ‘아가씨 장사’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이 씨는 “전쟁이 끝나고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 아가씨 장사를 했다는 이모(88)씨의 뒷모습. 그 장사로 이씨는 아들을 대학에 보냈다고 했다.
▲ 아가씨 장사를 했다는 이모(88)씨의 뒷모습. 그 장사로 이씨는 아들을 대학에 보냈다고 했다.

김모(86)씨는 미군들에게 세를 주며 살았다. 작은 방은 한 달에 6만원, 큰 방은 한 달에 7만원을 받았다. 월세를 안 내고 떠난 미군도 적지 않았다. 미군을 받다보니 어느날부터는 아가씨들 출입이 잦아졌다. 김씨는 “여자들하고 우리 집에서 같이 살기도 했는데 대화를 할 일이 없었다”며 “그 사람들은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이라고 했다. ‘미군 1명이 한국인 10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돌 정도로 캠프페이지는 소양동 지역 경제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김씨는 “미군에게 세 줬던 사람들 중에서 남아있는 사람은 나 하나”라고 했다.

김창묵(91) 전 서부시장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사거리 골목 중 뒤쪽은 전부 술집이었고 미군부대가 있으니 ‘양색시’들이 있었다”고 했다. “미군만 2만여 명이었고 이들을 상대하는 여성들만 200~300명이었으니 골목이 늘 북적이고 30년 동안 집창촌이 됐다”고 했다.

소양동을 중심으로 한 장미촌은 춘천역 인근 난초촌과 함께 춘천 대표적인 집창촌으로 분류됐다. ‘성업’했던 장미촌은 2000년대 들어 전국적인 정비가 이뤄지면서 폐쇄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장사를 하던 이들 대부분은 원주로 갔다고 했다. 이 씨는 “춘천에서 ‘아가씨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다 원주로 갔다”며 “춘천은 월세가 40만원, 50만원인데 당시 원주는 세가 30만원으로 저렴했다. 내가 아는 사람도 원주로 가서 거기서 장사를 이어갔다”고 했다.

오세현·양유근·이정호·이태윤


◇…사창고개는 소양로 일대 운영되던 사창가와는 무관한 지명이다. 근화동 소양로 일대는 과거 평야지대로 국가 창고인 사창(司倉)이 있던 곳이다. 춘천 소양로 일대에 설치된 창고와 관련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담겨있다. 이 책에는 “소양강창(昭陽江倉) 부 북쪽 5리에 있다. 본부와 홍천, 인제, 양구, 낭천(화천) 등지의 전세를 거두어 수운으로 서울에 이른다”고 적혀있다. 따라서 사창이 있던 고개가 지금의 사창고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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