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술을 사랑하는 이야기
(1936년 6월 ‘삼천리’ 제8권 6호)
춘천 자라우마을 어느 겨울
자정 넘어 술 마시고 집에 오니
자신 발자국 쫓아온 호랑이
이웃집 개 물어가 한바탕 소란
금주하며 ‘몽견국성후기’ 써내
‘개벽사’ 이끌던 청오 차상찬
일제 검열 시달림 술로 풀며
술에 대한 유쾌한 글 써내기도
1918년 셋째 형 떠나 보내고
그리움 달래러 고향 찾은 시기
당시 에피소드 ‘애주기’ 담겨

춘천 출신 언론인이자 사회·문화운동가인 청오 차상찬 선생은 장르를 망라해 수많은 글을 남겼다. 그의 방대한 저술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그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지역 차원의 선양사업도 활발해지고 있다. 강원도민일보는 청오차상찬기념사업회, 강원문화교육연구소와 함께 현대문으로 읽기 쉽게 번역한 청오 선생의 글을 시리즈로 연재, 독자들과 나눈다. 어린이와 식민지 치하에 놓인 민족을 보듬고, 조국의 독립과 조선문화 창달을 위해 헌신한 그의 글을 통해 100년 전 오피니언 리더의 생각을 되돌아 보자.

■ 술을 사랑하는 이야기-애주기(愛酒記)

남들은 나를 큰 술꾼으로 아는 이들이 많이 있으나, 사실 나는 아직은 술나라(酒國)에 국민 될 자격이 없다.

첫째, 아직까지 혼자서 술집에 갈 용기가 없고.

둘째, 술 먹은 다음 날에 해장할 줄도 모르고.

셋째, 아직도 식사할 때 밥에 곁들여 반주도 못 먹고.

넷째, 술 마시기 30여 년에 신발 한 번을 아직껏 빠져보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면 어째서, 나는 술꾼이라는 말을 들을까. 그것은 아무 이유도 없고 자못 버릇들이 있는 까닭이니, 술을 안 먹다가도 누가 먹자고 하면 싫다는 말을 못 하고, 술좌석에서는 엉덩이가 질겨서 언제나 끝장까지 보는 것이다. 그러나 고약한 술버릇은 또 없다. 술자리에서 흥이 나면 할 줄 모르는 노래도 하고, 한시도 짓기도 하고, 남의 시도 많이 읊기도 하는 일이 있으나, 딱히 무엇을 이렇다고 내놓을 것은 없다.

17∼18년 전에 한가한 시간이 있어서 시골집에 가서 겨울을 보낸 적이 있다. 별일도 없고 오래 소식이 없었던 친구들과도 어울리게 되니, 자연스레 돌아가면서 술을 사며 계속 마시게 되었는데, 한 번은 아주 위험한 일을 겪었다.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어느 날 읍내에 들어가서 친구들과 같이 술을 먹었는데, 마침 눈이 펄펄 와서 애주가로서 한잔 먹을 만한 분위기였다. 그럭저럭 어울리다 보니 술을 자정까지 마셨다. 읍내에서 그냥 잤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술에 취한 용기에다 겸해서 눈 내린 달밤의 경치가 매우 좋아서 읍에서 한 십 리 정도 되는 산간 도로를 혼자 걸어왔었다. 물론 그때의 흥취는 술 좋아하는 사람은 대강 짐작할 만큼 좋았고, 집에까지 아무 실수도 없이 잘 왔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집에 들어와 자리에 누워 있으려니까, 이웃집에서 “껑이 껑이”하고 개의 외마디 울음소리가 나더니, 여러 사람이 아우성을 치고 야단들이었다. 알고 보니 호랑이란 놈이 이웃집 개를 물어간 것이었다. 아침에 동네 사람들이 눈 위에 있는 호랑이의 발자국을 살펴보니, 그놈이 약 오 리 되는 곳에서부터 내 뒤를 쫓아온 모양이다. 비록 내가 술 나라의 천자(天子)*이지만 명색이 왕이니까, 감히 무례하게 업신여기지 못하고 나를 보호만 하면서 왔다가, 그 대신 보상으로 이웃집 개를 물어간 것이었다. 그때는 내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셨는데, 그 사실을 아시게 되고 여간 걱정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날부로 얼마간 술을 끊고, 장난삼아 아래와 같이 ‘몽견국성후기(夢見麴城候記)’란 것을 지었던 것이다. 글이 모두 한문인데다 그 글이 잘 되지도 않았으나, 나의 술에 관한 기념문(紀念文)이요, 또 내가 술에 대해서 어떠한 굳은 결심이 한때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이제 편집부 형이 귀찮게 조르고 독촉하는 바람에 그런 술자리에서 지은 시의 구절을 찾다가, 옛날에 써놓은 원고 중에서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고 대강대강 거칠게 기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글을 취미 장난삼아 지은 지도 벌서 17년 전이요. 우리 어머니도 돌아가신 지도 오래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비록 여전히 술을 먹는다 해도, 그러한 따뜻한 사랑의 말씀, 엄중한 가르침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술에 관한 글을 쓰자니 마음 깊이 흐르는 눈물에 붓이 젖을 뿐이다.(이하 ‘몽견국성후기’ 생략)

· 발췌문헌=‘삼천리’ 제8권 6호, 1936년 6월
· 현대어 번역= 강원문화교육연구소

■ 해설

“개벽사를 이끌어 나가던 청오 차상찬은 하루하루가 ‘조마조마’였다. 검열에 걸릴까봐 조마조마, 출두하라는 전화가 걸려올까봐 조마조마,… 이런 초조를 풀어주는 곳은 선술집밖에 없었다.” (윤석중 ‘어린이와 한 평생’ 범양사, 1986)

위 글처럼 차상찬에게 술은 친구이자 위로 같은 존재였고, 그는 종종 ‘주국헌법’(별건곤 4권 2호, 1929년 2월)처럼 술에 대한 유쾌한 글을 써내기도 했다. 이 ‘애주기’는 차상찬이 1918년경 고향인 춘천 송암리 자라우 마을에 내려와 겪었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3·1운동 직전의 혼란스러운 때였으며, 개인사적으로는 넷째 형 차상준에 이어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의지했던 셋째 형 차상학이 40세를 일기로 갑자기 별세한 시기이기도 하다.

차상학은 차상찬 이전에 강원도가 배출한 인재였다. 그는 ‘강원도 최초의 기자’로 만세보 기자를 거쳐, 천도교회 월보의 초대 주간,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특히 한학과 한시에 뛰어나, 손병희로부터 ‘당대 명문장가’라는 칭호를 들었고, 이돈화도 ‘한시로 당대 가장 뛰어난 일인자’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차상준은 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일대에서 교사로 지냈다.

두 형의 죽음은 차상찬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1918년이면 고향에 아직 어머니도 살아계셨을 때였으므로, 고향 방문은 형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 삶에 잠시 ‘쉼’을 주고자 하는 행보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현준 강원문화교육연구소 차상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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