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듯 … 아직 못다한 겨울 이야기
새하얀 설경 오랜만에 떠난 백패킹
낙동강·한강 발원지 삼수령서 출발
봄으로 가는 막차 타고 눈꽃산행
드넓은 고랭지배추밭 다시 만나
18년 전 여름밤 추억 새록새록
두려움 밟으며 나아가는 용기로
무릎까지 쌓인 눈길 속 걸음걸음

▲ 3월의 눈꽃산행. 태백은 여전히 한겨울이다.
▲ 3월의 눈꽃산행. 태백은 여전히 한겨울이다.

“낙동정맥 같이 갈래?” 일전에 함께 일했던 직장 선배가 난데없이 취해온 연락은 같이 산에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한때 산악 잡지를 만들었고 우리 모두 지금까지 꾸준히 산을 오르고 있기에 그의 제안에 특이한 점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어떠한 오해로 3년이라는 공백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려 3년이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과 산에 간다니. 문득 옛 시절이 떠올랐고 모처럼 그와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 가자!”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서 걱정이 뒤따라왔습니다. ‘… 추운데 괜찮을까?’ 왜냐하면 이번 산행은 당일 산행이 아니라 산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백패킹’이었기 때문입니다. 백패킹(Backpacking)이란 1박 이상의 야영 생활에 필요한 장비를 배낭 안에 모두 넣고 산과 자연을 걷는 여행을 말합니다. 물론 저에게도 백패킹 경험이 더러 있었지만 산을 빠르고 가볍게 달리는 트레일러닝(Trailrunning)을 취미로 즐긴 이후로 무겁게 배낭을 짊어지고 산에서 오래 머무는 백패킹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하지만 이내 거짓말처럼 백패킹만의 여운이 되살아났습니다. 아니, 온몸을 엄습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길게, 다만 산이 밤에 완전히 잠기기 전까지 걷고, 또 질릴 때까지 계속 걷고, 그러다 하룻밤 머물 만한 숙영지를 골라 주변을 치우고 텐트를 치는 그 번거롭고 귀찮은 여정이. 여름에는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지 못해 찝찝하고 겨울에는 몸이 식어 한기에 벌벌 떨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독한 밤이 말입니다.

어영부영하다가 무르지 못한 약속은 기어이 다가왔고 정신 차리고 보니 삼수령 앞입니다. 삼수령(三水嶺)은 태백 삼수동과 황연동 경계에 위치한 해발 935m의 고개입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 물줄기가 갈라지는 분수령이지요.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 북쪽으로 흐르면 한강을 통해 서쪽의 서해로, 동쪽으로 흐르면 오십천을 통해 동쪽의 동해로,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을 통해 남해로 간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낙동강의 발원지인 태백 황지연못도, 한강의 발원지인 태백 검룡소도 모두 그 시작은 삼수령입니다.

때는 3월 초순인데 태백은 아직도 놀랄 만큼 한겨울입니다. 과거로 떠난 여행일까요? 마치 어느 시점에서 시간이 불쑥 멈춰버린 것 같습니다. 타고 온 차를 언덕 외진 구석에 세워두고 한자리에 서서 잠시 주춤하다가 작심한 듯 찬 눈바람이 부는 설경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걸어가면 갈수록 세상이 한통속으로 하얘집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커다란 갈피만 잡고 그저 앞으로 나아갑니다.

삼수령이 한강, 낙동강, 오십천이 발원하는 분수령이라면 매봉산은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갈라지는 분기점입니다. 낙동정맥(洛東正脈)은 매봉산에서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 이르는 390여 ㎞의 산줄기입니다. 매봉산 정상은 해발 1303m, 함백산 자락의 천의봉(天儀峯)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매처럼 날렵한 매봉산의 산세는 제 기억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어떠한 오해로 지금은 만나지 않는 친구를 당시 겨우 설득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오른 산이 여름의 매봉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걸으면서 보았던 달밤의 고랭지배추밭을 잊을 수 없습니다. 원체 광활한데 어둠까지 번진 나머지 어찌나 거대하게 보이던지요. 친구와 서로의 옷깃을 부여잡고 두려움을 밟아가며 매봉산을 향해 올랐던 일이 떠오릅니다. 왜 하필 우리가 그때 매봉산에 갔던 건지, 왜 하필 달밤의 산을 올랐던 건지, 산에서 내려와 어디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전후의 일들은 하나도 생각나는 것이 없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산 사면에 거대한 고랭지배추밭이 밑도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이고 그 위로 매봉산이 매처럼 날개를 편 듯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막차를 타고 그때 그 길을 다시 걷고 있습니다. 눈이 모든 것을 뒤덮은 산에서 길을 찾는 것은 어쩌면 무용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우리가 가는 곳이 곧 길이라고 믿고 묵묵히 나아가는 용기가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발목을 넘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다 보면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질 것만 같은 불안함도 듭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일 뿐 머잖아 길의 흔적이 희미하지만 보란 듯이 나타납니다.

새하얀 설경 속에서 앞서 걷는 이들의 뒷모습이 유난히 화사합니다. 그 모습에 힘도 나고 위로도 얻습니다. 대체로 혼자 말없이 오르던 산이었는데 얼마 만에 무리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오르는 산이던가요. 때로는 한데 뭉쳐 시끌벅적하게 떠들다가, 또 앞뒤로 둘씩 걸으면서 살아가는 일의 설렘과 고됨을 짙게 나누다가, 또 서로가 보일 정도로 적당히 간격을 둔 채 네 개의 외로운 섬이 돼 각자의 침묵 속으로 파고들다 보니 왠지 긴 세월이 흐른 느낌입니다. 어제의 오해는 온데간데 없고 오늘의 이해와 내일의 화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산은 그런 곳입니다.

정오경 매봉산에 도착합니다. 10시쯤 삼수령을 출발했으니 겨우 2㎞ 남짓한 길을 장장 2시간 동안 오른 것입니다. ‘여기가 끝이냐’는 물음에 선배는 극구 ‘이제부터가 시작이다’라는 말을 건넵니다. 첫 단추를 잘 꿰였으니 이제부터는 조금 나을 것이라는 격려도 함께요. 산길 한구석에서 냉동고처럼 얼어붙은 이정표를 놓치지 않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배낭의 어깨끈을 다시 한번 단단하게 조이며 짊어진 작은 생의 무게를 한 번 더 가늠해봅니다. 내려놓고 멈추고 싶지만 가야 할 길이 아직 멀기에 지체하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모여서 조금 쉴 뿐입니다.

올라왔던 길을 거꾸로 내려가니 조금 전 지났던 설원이 다시 나타납니다. 오르면서 다져놓은 길이 도움이 됩니다. 내가 부단히 걸어온 길이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됩니다. 고랭지배추밭을 벗어나 구봉산으로 향합니다. 다행히 진입로를 찾아 수월하게 낙동정맥 위에 섭니다. 우리는 오늘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하산할 걱정은 하지 않고 믿고 산에 머무는 감각, 그저 순간에만 집중하는 감각에 몸과 마음을 맡깁니다. 길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우리는 조금 더 걷기로 합니다. 해가 질 때까지 길게, 산이 밤에 완전히 잠기기 전까지.

작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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