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행스님 오대산 월정사 선덕 조계종 원로 의원
원행스님 오대산 월정사 선덕 조계종 원로 의원

우리나라 직업명 가운데 교사와 목사를 제외하고 스승 사(師)자를 쓰는 직종은 단 세개에 불과하다. 의사(醫師), 약사(藥師), 간호사(看護師)다. 금방 눈치챘겠지만, 모두 생명과 직접 관련된 직업이다. 판사, 변호사, 정비사, 공인중개사, 운전기사 등 다른 직업은 모두 선비 사(士)자를 쓴다.

의사, 약사, 간호사만 스승 사(師)자를 써서 예우해 주는 까닭은 그만큼 생명을 다루는 일이 아주 특별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의사의 경우 그 역할에 맞게 사회적 지위도 높고 수입도 월등히 많다.

그래서인가. 최근 발표된 우리나라 인기 대학과 학과의 순위표를 보면 모두 각 대학의 의대와 치대가 상위권을 차지했다.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들만 간다던 물리학과, 전산학과, 법학과는 모두 하위권으로 처졌다. 이는 분명 기현상이다.

최근 의대 정원 증원 문제를 놓고 정부와 의사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얘기를 들어보면 정부는 정부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병원은 병원대로, 환자는 환자대로 찬반에 관해 다 타당한 이유를 들고 있다.

의료 문외한으로서 의료 시스템의 자세한 내용이야 알 수 없으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의료대란이 일어나는 걸 보면 그동안 정부와 의료계는 문제를 개선하는 데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쉽게 말해 주먹구구식 땜질 처방만 했다는 건데, 그러다 보니 문제는 누적될 대로 누적돼 이제는 누구도 메스를 들기 힘든 지경에 이른 느낌이다. 생명을 다루는 분야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생명체를 다섯 종류로 본다. 비늘이 있는 생명체(鱗族), 날개가 있는 생명체(羽族),

털로 덥힌 생명체(毛族), 갑옷을 입은 생명체(甲族), 털 없는 생명체(裸族)로 각각 5만, 전체 25만 종의 생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현대 과학으로 밝힌 전체 생명체 숫자와 비교하면 턱없이 적을 테지만, 몇천년 전 우주관으로 보면 25만은 무한대다. 그 모든 생명이 옛날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생로병사했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하면서 수명과 인구가 늘고 덩달아 경제도 크게 발전했다. 의학이 오늘날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 바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의료행위를 자영업으로 볼 것인가, 공공영역으로 볼 것인가, 그 둘 다라면 어느 선까지 경계 지워져야 하느냐는 건데 갈등은 모두 이곳에서 생긴다. 25만 생명체의 목숨이 이 경계선이 어디까지 그어지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말이다.

지금 의료계의 문제를 의사 숫자, 보험수가, 필수 의료인력, 광역 거점병원 같은 시스템의 개선으로 풀어서는 해결책이 쉽지 않으리라고 본다. 먼저 생명 사상이 선행돼야 한다. 밑바탕에 생명에 대한 무한한 존중이 깔리지 않고는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지난 2013년 650억달러(약 86조 원)에 이르는 자신의 재산을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데 쓰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한 조치로 우선 2019년까지 18억달러(약 2조 원)를 전 세계 소아마비 퇴치 운동에 썼다. 워런 버핏도 세계 보건 수준을 향상하는 재단에 175억달러(약 23조 원)를 기부했다.

지난해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이익에 어두워 의(義)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크든 작든 생명을 바탕으로 한 공공선(公共善)에 관해 우리 모두 관심을 기울일 때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하지만, 진짜 문턱은 여기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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