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물걸리 동창만세운동이 있은지 87년이 지난 4월3일 동창마을의 아침은 너무나 평온했다.
 그날의 한 맺힌 만세가 잊혀진 것일까. 동창의 산, 들, 땅은 그때를 지운 것일까.
 걱정스레 여덟열사의 혼이 담긴 기미만세상 앞에 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길 간절히 청했다.
 1919년 4월3일 아침, 불혹의 나이를 넘긴 장두 김덕원은 목젖에 피멍울이 맺힐 때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장두와 함께 물걸리 동창마을에 모여선 3000여 군중의 함성은 천지를 뒤흔들어 바다 건너 왜의 땅까지 전해질 것 같았다.
 만세소리가 3차례나 울렸을까? 하늘이 뚫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앞서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 둘 고꾸라졌다. 무리는 순식간에 혼비백산해 초점 둘 곳을 잃고 뒤엉켰다. 힘차게 펄럭이던 흰 태극기도 흙먼지에 뒹굴었다.
 작은 산골마을에서 울려 퍼진 만세운동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8명이 목숨을 잃고 부상자는 수백명을 넘어서 마을 분위기는 한 없이 가라앉았다. 김덕원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중심대열을 이끌고 산으로 내달리며 이 애달픈 민족을 굽어 살펴달라고 절규했다.
 그 만세운동 속에 갇혀 한참을 헤매던 때 어린아이의 까르르 웃음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장난끼 가득한 꼬마가 기미만세상을 가리킨다.
 "엄마, 저 아저씨들은 누구야?"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여기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용감하게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이야."
 동창마을의 아이들은 기미만세공원과 김덕원 의사가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마방터, 여덟 열사의 숭고한 넋이 담겨져 있는 팔렬각, 김덕원 의사가 동창만세운동 후 고난을 겪으며 머물렀던 청로봉 등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어 어느 결에 애족의 씨앗을 틔우고 있었다.
 마방터 근처에 있는 마을주민은 동창마을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그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건, 엄청난 일이죠. 외지 사람들한테 내가 이 마을 사람이라고 얼마나 자랑한다고요"
 마을 곳곳에 있는 70여개의 돌비석 역시 그날을 담아내고 있었다. 여초 김응현 옹, 황재국 강원서학회장, 김광희 강원서예대전운영위원장, 황금찬 시인,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최규하 전대통령, 박중훈 전 성균관장 등 사회각계 인사와 문화예술인들의 글과 글씨가 비석과 현판 등에서 혼을 발하고 있었다.
 김창묵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도 많은 이들이 방문할 방법을 고민하며 애쓰고 있었다.
 10여 년 동안 사재를 털어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김덕원 의사가 울분을 삼키며 거닐던 덕원산길도 등산로로 단장했고 청로봉 아늑한 곳에 누각도 세웠다. 김 의사가 은둔하던 다락방을 보존정화 했으며 3·1절마다 그날을 기리는 행사를 펼치고 있다.
 그랬다. 결코 잊혀진 것이 아니었다. 동창마을 어귀부터 불쑥불쑥 보이는 비석, 기미만세공원, 청루각까지 이어지는 기념비들은 그날의 행적을 낱낱이 고하고 있었다.
 김창묵 회장과 함께 가파른 길을 따라 하늘과 가까운 청로각에 오르니 동창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따사로운 봄볕에 몸을 맡기고 있던 김 회장이 문득 이미자가 노래한 '척야산 진달래' 곡 가사를 읊조리며 물었다.
 "척야산 진달래 왜 그리 붉게 피는가라는 구절이 있지. 자네, 이곳 진달래가 왜 해마다 붉게 타는지 아는가?"
 진달래꽃은 올해도 선홍빛 울음을 머금고 지천에 흐드러질 것이다. 동창마을을 나오는 길, '척야산 진달래'를 가만가만 불러본다. 그리고 알았다. 이곳 동창에 진달래꽃이 피는 한 동창의 만세소리는 영원하리라는 것을….

김덕원 누구인가

 김덕원, 그는 누구인가?
 홍천 물걸리 동창. 이 작은 마을에서 어떻게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 항일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만세운동이 일어나기까진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장두 김덕원이다.
 김덕원 의사는 1876년(조선 고종 13년)11월 26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마을에서 태어났다. 1894년 19세 되던 해에 동학에 입도해 동학군으로 활동했다.
 민족정신이 투철한 가문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던 중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패망하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구국일념으로 당시 상당한 가재(家財)를 항일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비밀조직을 결성해 항일운동을 하던 중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 함성이 국내외로 퍼지고 홍천까지 여파가 밀려오자 김 의사는 4월3일로 거사일을 정하고 인근 2개군 5개면에 밀서를 전달, 만세운동에 가담하도록 했다.
 드디어 4월3일이 되자 물걸리 동창마을에는 대형 태극기가 높이 걸리고 5개 면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비석거리 다리목 시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인파는 3000명을 헤아렸다.
 장두 김의사는 궐기사에서 "우리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한 사람도 이탈없이 최후의 일각까지 싸웁시다"고 외쳤다.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일본 헌병대가 무차별 발포, 8명(지금의 팔렬사)이 숨지고 사상자와 체포자도 수백에 이르렀다.
 김의사는 뒷일을 도모하기 위해 야산을 전전하며 외딴집 다락방에도 은신했으나 결국 검거돼 춘천형무소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실명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4년 만에 풀려나지만 3년 후 53세의 일기로 쓸쓸한 생애를 마쳤다.


"선인 심정 헤아려야"

 최근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역사교과서 왜곡을 지시, 또다시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가운데 홍천 동창만세운동의 주역인 김덕원의사의 후손이 항일의사들을 기리는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김창묵(85·사진)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은 지난 95년 강원도민일보 등과 함께 공동으로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를 발족한 때부터 10여년이 넘게 항일의사들의 넋을 기리는데 힘 쏟고 있다.
 그는 "나라가 없고 민족혼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무"라며 "후손된 도리로 조금이나마 그분들의 뜻을 기리고 그들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지금까지의 활동을 설명했다.
 하지만 3·1운동 행사가 있을 때만 사람들이 찾아 고민이다. 또 개인의 물질적 행복을 이루는 데만 급급할 뿐 옛 역사를 돌아보지 않는 요즘 사람들의 모습도 김 회장을 가슴 아프게 한다.
 그는 "조국을 잃고 민족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을 때에 독립의사들이 갖은 고초를 겪으며 어렵게 찾은 광복"이라며 "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것에만 충실할 뿐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일에는 무디다"고 쓴 웃음을 지었다.
 "이 공원을 통해 조금이라도 그들을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거죠."
 그는 현충사나 아침고요수목원처럼 사람들이 소풍 오듯 놀러왔다가 자연스럽게 선열들의 마음을 느끼고 항일투사들의 활동을 알아가길 바랐다.
 그래서 기념공원과 청로봉 등에 나무를 심고 꽃을 심는 등 휴식공간으로도 활용될 수 있도록 조경에 신경 쓰는 이유다. 또 동창마을에 추모비, 묘석비, 시비, 사적비 등을 세우고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비문 작업을 한 것은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김 회장의 꼼꼼한 전략이기도 했다.
 앞으로 김덕원 의사의 성역화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를 스스로 지키지 못한 뼈아픈 역사도 반성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찬란했던 문화도 그 후손들이 받들지 못한다면 한낱 이름 없는 역사로 묻혀버릴 것"이라며 "후손들은 우리 선열들이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동창마을 척야산을 헤맸던 그 심정을 헤아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지영 jyp@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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